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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화장지 떨어져가는데…수에즈에 묶인 14조원어치 상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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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5일(현지시간) 이집트 수에즈 운하 에거기븐호 좌초현장에서 오사마 라비 수에즈운하청(SCA) 청장이 에버기븐호를 살펴보고 있다.[AP=연합뉴스]

지난 25일(현지시간) 이집트 수에즈 운하 에거기븐호 좌초현장에서 오사마 라비 수에즈운하청(SCA) 청장이 에버기븐호를 살펴보고 있다.[AP=연합뉴스]

길이 400m, 규모 22만4000t의 선박 한 척이 세계 경제를 위협하고 있다. 세계의 ‘물류 대동맥’이라 불리는 이집트 수에즈 운하를 막고 멈춰 선 컨테이너선 에버기븐 얘기다.

유럽 ‘자동차·커피·대란’에 아시아 가전업체도 직격탄

지난 23일(현지시간) 좌초된 이 배를 다시 물에 띄우기 위한 작업이 이뤄지고 있지만 큰 진전이 없다. 사태가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지면서 세계 무역 공급망이 '동맥경화'에 빠졌다. 이미 들썩이는 미국발 인플레이션에 에버기븐이 기름을 부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에버기븐은 지난 23일 오전 홍해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지나 북진하다 통제력을 잃고 좌초됐다. 지난 27일까지 닷새간 배를 물에 다시 띄우는 시도를 했지만 실패했다.

뱃길 막힌 수에즈 운하.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뱃길 막힌 수에즈 운하.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오사마 라비 수에즈운하청(SCA) 청장은 이날 “배가 앞으로 수일 안에도 다시 물 위에 뜨지 못하면 배에 실린 컨테이너 수천 개를 내리는 ‘플랜C’를 가동해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컨테이너를 빼내 무게를 줄여 배를 움직이겠다는 얘기다.

해운·선박 전문가들은 이 방법으론 운하 재가동에 몇 주일이 걸릴 거라 본다. 사고 현장은 항구 하역시설과 멀리 떨어져 있고, 컨테이너 무게가 개당 약 30t에 이르기 때문이다. 세계 교역량의 12%를 차지하는 수에즈 운하의 마비 상황이 길어질 가능성이 커진 셈이다.

46년만 희망봉 노선 전환?…운송 거리·해적 걱정

지난 26일 수에즈운하에 좌초된 에버기븐호의 모습. 운하를 가로막고 서 있다. [AFP=연합뉴스]

지난 26일 수에즈운하에 좌초된 에버기븐호의 모습. 운하를 가로막고 서 있다. [AFP=연합뉴스]

이미 수에즈운하 발 세계 ‘무역 동맥 경화’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 27일 기준으로 수에즈 운하 양쪽에서 정체 상태로 머무는 선박은 429척으로 급증했다. 지난 23일 약 100척에서 4배 이상 늘었다.

월스트리트저널(WSJ) 등에 따르면 지난 26일 기준 수에즈 운하 양 끝에서 통행이 재개되길 기다리는 선박 237대엔 총 120억 달러(약 13조5780억 원)어치의 화물이 실려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기 중인 선박이 늘면서 화물량도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미 CNBC방송은 해운정보업체 로이즈리스트를 인용해 이번 사고로 시간당 약 4억 달러(약 4500억원)어치의 물류 운송이 지체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하루로 따지면 100억 달러(약 11조3150억원)의 물류 지연 손실이 발생하고 있다고 추산했다.

마음이 급한 일부 운송사는 우회 노선을 택하고 있다. 해운 전문지 쉬핑와치 등에 따르면 국내 최대 원양 컨테이너 선사인 HMM은 이번 주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예정이던 2만4000TEU급 ‘HMM 스톡홀롬호’ 등 선박 4척의 항로를 변경해 남아프리카공화국 희망봉 노선으로 우회하기로 했다. 이집트-이스라엘 전쟁으로 수에즈 운하가 막혔던 1975년 이후 46년 만이다.

수에즈운하 사태로 인한 피해 규모 추산치.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수에즈운하 사태로 인한 피해 규모 추산치.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하지만 수출업체들이 희망봉 노선을 택하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영국에 전기자전거용 리튬배터리를 수출하는 일본업체 엔비전AESC 관계자는 WSJ에 “희망봉을 도는 항로로 운송하면 기간이 수주는 더 걸릴 것”이라면서 “운송 거리도 길어지기 때문에 비용도 당연히 더 든다”라고 말했다.

희망봉 노선의 또 다른 복병은 해적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아프리카 북동부 해역에서 오랜 기간 해적이 활동해왔고 서아프리카 해역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운송로’로 여겨진다"고 전했다. 수출업체 입장에선 수에즈 운하 재개를 마냥 기다릴 수도, 그렇다고 비용 상승과 해적 위험이 큰 희망봉 노선을 택하기도 난감한 상황이다.

유럽 “자동차 생산 차질, 커피·휴지 부족 직면”

지난해 4월 독일 볼프스부르그에 있는 폴크스바겐 공장에서 노동자가 작업을 하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지난해 4월 독일 볼프스부르그에 있는 폴크스바겐 공장에서 노동자가 작업을 하고 있다.[로이터=연합뉴스]

수에즈 운하가 막히며 가장 피해가 큰 곳은 유럽이다. 국제신용평가사 무디스의 대니얼 할리드 부대표는 WSJ에 “유럽의 자동차 제조·부품업체가 가장 타격받을 것”이라며 “현재 유럽에선 공장에 부속품 재고를 두지 않고 공정에 맞춰 공급받는 ‘적시생산방식’(JIT)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커피와 휴지 공급도 힘들어질 수 있다. 유럽은 수에즈 운하를 통해 로부스타 커피 최대 생산지인 베트남 등에서 커피를 들여오고 있다. 화장지의 원료가 되는 펄프의 운송도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는 길이 차단될 수 있다.

이집트를 중동·아프리카의 제품 판매 생산기지로 삼은 아시아 가전업체도 피해를 볼 수 있다. WSJ은 “LG전자는 중동과 아프리카에 파는 TV를 이집트에서 조립한다”며 “현재는 시장에 재고가 충분하지만 수에즈 운하 사태가 지속하면 매출에 영향이 있을 수 있다”고 전했다.

지난 26일(현지시간) 스페인 마드리드의 한 커피숍에서 직원이 커피를 만들고 있다.[AP=연합뉴스]

지난 26일(현지시간) 스페인 마드리드의 한 커피숍에서 직원이 커피를 만들고 있다.[AP=연합뉴스]

원자재 공급지연·가격 상승…美 인플레이션 가능성↑

수에즈 운하 발 물류난이 인플레이션 우려에 기름을 부을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블룸버그는 “이미 컨테이너와 선박 부족으로 글로벌 운송에 차질이 생긴 와중에 수에즈 운하 사고까지 겹쳤다”며 “사고 여파는 유럽을 넘어 전 세계로 확대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크리스 로저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수석 무역분석가는 블룸버그에 “운송 지연에 따른 비용 증가 가능성이 커지며 인플레이션 압력도 높아질 것”이라며 “단기적으로 소비재 재고 부족 가능성도 커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원자재 가격 상승도 피할 수 없을 전망이다. 해상 원유 주요 수송로인 수에즈 운하를 통한 길이 막히며 국제 유가 인상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어서다. 원유자료 제공업체 케이플러에 따르면 지난해 하루 평균 해상으로 운반된 전체 원유 3920만 배럴 가운데 수에즈운하를 통과한 원유는 1740만 배럴에 달했다. 이미 국제 유가는 들썩이고 있다. 27일 서부텍사스유(WTI), 브렌트유·두바이유 모두 4% 넘게 상승하며 배럴당 60달러를 넘겼다.

지난 2월 미국 뉴욕을 시민들이 걸어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2월 미국 뉴욕을 시민들이 걸어가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WSJ는 “미국에서 30년 만에 가장 강력한 경제 성장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수에즈 운하 사태가 터졌다”며 “소비 심리가 폭증하는 가운데 제품 가격이 급등할 가능성이 커졌다”고 분석했다. 올해 미국 경제 성장률은 6~7%를 기록하며 중국을 앞설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상황이 빠르게 나아지기도 어려울 전망이다. 세계 2대 해운사인 MSC는 “운하가 신속히 뚫리더라도 당분간은 어려움이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대기 중 선박이 워낙 많은 데다 일부 항구에서 물류 급증으로 처리가 늦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승호 기자 wonder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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