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일본에 팔려갔던 자선당, ‘불 먹은 돌’로 돌아온 사연

중앙일보

입력 2021.03.28 13:00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39)

자선당은 일제강점기에 경복궁의 많은 전각이 파괴되면서 일본으로 팔려갔던 건물이다. 오쿠라 기하치로(大倉喜八郞.1837∼1928)는 청일 전쟁 때 무기와 군수물자를 팔아 거부가 되었다. 그리고 1878년 부산에 진출해 고리대금업과 무역업을 하면서 엄청난 양의 한국문화재를 일본으로 빼돌린 장본인이다.

일제는 1915년 조선 통치 5주년을 맞아 조선물산공진회를 열었는데, 경복궁 곳곳을 헐어 자재를 민간에 팔아넘기는 만행을 저질렀다. 당시 조선물산공진회 건축 책임자이자 경복궁 철거업무를 맡았던 일본인 오쿠라는 1914년부터 자선당을 철거하고, 그 부재를 배에 실어 일본으로 빼돌렸다. 오쿠라는 그의 집에 이축한 자선당을 ‘조선관(朝鮮館)’이라는 개인 미술관으로 사용했다.

복원된 자선당 모습. [사진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복원된 자선당 모습. [사진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

그러나 자선당이 이축된 지 10년도 안 된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건물은 불타고 기단과 주춧돌만 남게 되었다. 이렇게 불탄 자선당의 기단으로 사용되던 돌무더기가 김정동 목원대 교수의 조사와 추적 끝에 1993년 일본 도쿄 오쿠라 호텔 내 정원 산책로에서 발견되었다. 그해 2월부터 동경대 객원 연구원으로 있던 김정동 교수(근대 건축사 전공)가 수개월간의 자료 조사와 현장 답사 끝에 자선당의 흔적을 찾아낸 것이다. 1995년 12월 말 오랜 협상 끝에 오쿠라 호텔이 삼성문화재단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110t 분량의 유구(옛날 토목건축의 구조와 양식을 알 수 있는 실마리가 되는 자취)석 288개가 반환됐다. 자선당의 주춧돌은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다가 고향인 경복궁으로 돌아왔지만 정작 1999년 자선당을 복원할 때는 환수된 유구는 ‘돌이 불을 먹어’ 제 구실을 할 수 없다고 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었다. 어렵게 돌려받은 자선당 유구를 자선당을 복원하는 건축재로 쓸 수 없게 된 것이다.

불에 타 검게 그을리고 무너져 내린 돌더미는 건청궁 옆 녹산(鹿山)에 그렇게 되돌아와 쓸쓸히 놓여 있다. 현재 자선당 자리에는 2001년 새 건물이 복원됐다. 경복궁에 가게 되면 자선당과 건청궁 뒤뜰에 꼭 들러보길 바란다. 지금도 대지진 당시 불을 먹은 돌은 녹산 숲 그늘에서 푸슬푸슬 그 살점을 떼어내고 있다. 하필 그 유구가 놓여있는 자리가 1895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의 시신을 일인들이 불태웠던 자리이고 보면 당시 우리의 힘없는 역사가 다시 한 번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한다. 나라를 잃으면 사람뿐 만아니라 건물도 이렇게 수난을 당했다.

그리고 최근 이 자선당 유구를 원위치로 돌리는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김정동 교수는 “자선당처럼 건축물 유구를 환수한 사례는 세계적으로 드문 경우”라며 “복원된 자선당 인근으로 옮겨 경복궁을 찾는 국내외 관람객이 잊힌 역사를 배우는 교육 현장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자선당의 온돌

자선당 기단과 주춧돌. [사진 문화재청 경복궁관리사무소]

자선당 기단과 주춧돌. [사진 문화재청 경복궁관리사무소]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최종덕 소장은 오래 전 미국의 한 대학에서 건축사 강의를 들은 적이 있었다. 당시 수업시간에 뜻하지 않게 한국의 온돌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묘한 흥분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 그는 지금 우리가 ‘전통 온돌’ 대용으로 쓰고 있는 ‘개량 온돌’의 발명자는 누구인가에 의문을 갖는다. 아궁이에 불을 넣어서 방바닥을 데우는 한옥의 전통적인 난방 방법인 온돌이 ‘전통 온돌’이라면, 요즘 우리나라의 아파트나 주택에서 흔히 쓰이고 있는 온수 파이프에 의한 온돌을 ‘개량 온돌’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1867~1959)는 폭포 위에 지은 집 낙수장(落水莊. Falling Water)과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 등을 설계한 세계적인 미국 근대 건축가이다. 세계적인 거장 라이트가 오레곤주에 1956년 설계한 ‘고돈 하우스’라는 주택이 있었다. 집 주인은 2000년 이를 다른 사람에서 팔았고, 새로운 집주인은 이 집을 철거하고 주변을 개발할 계획이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미국 전역에서 라이트의 고돈 하우스를 지키자는 보존운동이 일어났고 마침내 여기에 굴복한 소유주는 100일 이내에 고돈 하우스를 다른 지역으로 옮겨가는 조건으로 이 집을 공익 단체에 기증하게 되었다. 2001년 결국 이 집은 세 토막으로 분리되어 거대한 트럭에 실려 원 위치에서 약 40km 떨어진 오레곤 가든이라는 공원으로 옮겨져 다시 세워졌다. 라이트의 고돈 하우스가 트럭에 실려 옮겨지는 역사적인 광경은 CNN을 통해 미국 전역에 생중계되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방과 거실 바닥을 데우기 위한 온수 파이프가 깔려 있었다.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는 그의 자서전 『An Autobiography』에서 세 페이지에 걸쳐 한국의 온돌에 대한 그의 경험과 이에 대한 적용 사례를 자세히 밝히고 있다. 1914년 겨울 라이트는 제국호텔(오쿠라 데이고쿠 호텔) 설계를 의뢰한 도쿄의 오쿠라 남작 집으로 저녁초대를 받았다. 당시 일본의 난방용품 히바치(ひばち(火鉢))는 숯불을 담은 도기나 금속 용기로 우리나라의 화로와 거의 동일한 것이었다.  둥근 화로에 흰 재를 깔고 몇 개의 숯 막대를 담아 방바닥에 두는 겨울 난방 기구의 일종이었다. 사람들이 히바치 주변에 둘러 앉아 이따금씩 그 위에 잠깐 손을 올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추위를 쫓았지만 이런 난방 방식은 추위를 녹이기에는 많이 부족했다.

오쿠라의 저녁초대에 응한 라이트 일행은 예상대로 저녁식사 장소가 너무 추워 식사를 할 수 없었고 라이트는 겨우 먹는 시늉만 했다. 그리고 식사 후 라이트는 ‘한국식 방’이라고 불리는 곳으로 안내되었다. 이 방의 바닥에는 붉은 융단이 깔려 있었고, 벽은 아주 평평했으며 연노랑 색을 띠고 있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날씨가 바뀐 것이다. 갑자기 계절이 바뀌어 봄이 된 듯 했다. 라이트 일행은 몸이 따뜻해지고 행복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어디에도 난방을 위한 장치는 보이지 않았다. 난방이 아니라 기후가 변한 것 같았다. 오쿠라는 바닥 밑에서 불을 때는 온돌의 원리를 설명했다. 바닥으로부터의 난방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쾌적했다.

이를 경험한 라이트는 즉시 제국호텔의 욕실 바닥에 전기를 이용한 온돌을 적용했다. 라이트는 미국으로 돌아간 후, 그가 설계한 30채 이상의 건축물에 개량 온돌을 적용했다. 라이트는 바닥을 데우는 온돌을 가장 이상적인 난방 방식으로 보고 태양열보다 좋은 난방이라고 극찬했다. 라이트는 고든 하우스의 바닥에 온수 파이프를 깔고 그 위에 콘크리트로 마감했다. 요즈음 우리가 주택에 사용하는 개량 온돌 방식으로 1960년대 새마을 보일러라고 불렀던 새로운 난방시스템이다.

1914년 라이트가 만난 오쿠라 남작은 자선당을 옮겨 간 오쿠라 기하치로이거나 그의 일족일 가능성이 크며 그가 머물렀던 코리안 룸은 그 이전에 옮겨 간 또 하나의 한옥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라이트가 오쿠라 남작 집에서 경험한 것이 일본에는 없는 한국식 온돌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가 경험한 건물이 자선당이었는지 확실치 않다. 자선당이 해체되던 것이 1914년이지만, 자선당 건물이 도쿄 오쿠라의 집에 이건 된 것은 1916년이라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자선당이 아닌 다른 부속 건물이 먼저 지어진 것일 수도 있다. 나라를 잃고 팔려간 한국인의 집은 그렇게 겨울 난방의 혁신을 가져왔고, 우리는 라이트에 의해 개량된 온돌 시스템을 역수입해 현대식 온돌 문화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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