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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걸 판결문에 '국제인권법연구회 판사 101명' 실명 논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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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왼쪽)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 상임위원. [연합뉴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조실장(왼쪽)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 상임위원. [연합뉴스]

지난 23일 선고된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조실장과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직권남용죄 1심 판결문에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 101명의 실명이 포함돼 논란이 일고 있다. 초대 회장인 김명수 대법원장 취임 이후 법원의 신주류로 부상한 인권법연구회 회원 명단이 대규모로 공개된 건 처음이다.

서울중앙지법 형사32부(재판장 윤종섭)는 이 전 실장 등의 유죄를 선고하며 판결문 별지에 국제인권법연구회 소속 판사 101명의 이름과 당시 소속법원 등을 실었다.

인권법 연구회 판사 101명의 명단은 이규진·이민걸 판사의 유죄 부분을 설명하면서 언급됐다. 두 사람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및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과 공모해 행정처 김모 심의관에게 법원 내부망에 게시글을 올리게 한 것이 직권남용에 해당한다는 내용이다.

2017년 2월 13일 법원 내부망인 코트넷에 올라온 공지글에는 법원 내 전문분야연구회에 대해 ‘중복가입 해소조치’를 시행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대법원 예규에 따라 복수의 전문연구회에 가입한 판사들은 1개 연구회만 선택하고 나머지 연구회는 탈퇴하라는 취지였다.

재판부는 임 전 차장이 국제인권법연구회를 우리법연구회의 전·현 회원인 판사가 핵심이 된 연구회로 인식했고, 2017년 1월 인권법연구회가 개최하려던 공동학술대회는 대법원장의 인사권 행사 및 사법행정의 문제점을 공론화하려는 행사로 인식했다고 적었다.

이 때문에 임 전 차장이 인권법연구회의 세력을 약화·해소하려 했고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중복가입 해소조치’를 시행한 것이라는 게 결론이다.

재판부는 “임 전 차장은 양 전 대법원장의 주요 사법정책 추진 등에 매달려 인권법연구회를 주요 현안 반대세력으로 파악해 장애물로 여겼다”며 “중복가입 해소조치는 인권법연구회 등에 대한 제재이고, 이는 위법·부당한 동기나 목적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인권법연구회를 약화하려고 ‘중복가입 해소조치’를 통해 다수가 회원에서 탈퇴하도록 유도했다는 뜻이다.

실제 판결문 별지에 공개된 101명의 인권법연구회 법관 중 28명이 인권법연구회를 탈퇴했다고 나온다. 나머지 73명의 판사는 인권법연구회 회원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연구회를 탈퇴했다.

이들 실명이 포함된 판결문은 재판 당사자인 피고인, 검사와 피고인들의 변호사에게 전달된다. 또 법관들은 법원 내부 프로그램을 통해 열람할 수 있다.

이민걸 전 실장 등의 유죄 판결문에 인권법연구회 회원 명단이 대규모로 공개되자 법원 안팎에 논란도 일고 있다.

법조계에선 법원 판결문에 ‘인권법연구회 소속 회원 명단’이 실린 것 자체를 법적으로 명예훼손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해석이 중론이다. 명예훼손으로 형사·민사상 책임을 물으려면, 실제로 어떤 사람의 사회적인 평가가 저해됐다고 인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인권법연구회 명단에 포함됐다는 것만으로 사회적 평가가 낮아졌다고 인정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하지만 법적인 문제와 별개로 논란이 된 특정연구회 소속 판사들의 명단을 공개한 건 적절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무엇보다 재판받는 당사자들에게 판사가 특정 성향이라는 선입관을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법원 내에선 당시 탈퇴한 법관과 회원을 고수한 법관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할 수도 있다.

고등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결사의 자유에는 모임을 공개할지 비공개할지도 포함돼 있는데, 재판부에서 그 부분은 세밀하게 고려하지 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판결에서 형량이나 구성요건을 따지는 데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면 실명 공개보다 ‘A 판사 외 몇 명’과 같은 방식으로 쓸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수정·박현주 기자 lee.sujeo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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