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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독과 약 두 얼굴의 댓글, 그래도 무플보단 낫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백만기의 은퇴생활백서(82)

어느 날 신문에 기고한 글에 수백여 개의 댓글이 달린 적이 있다. 글의 내용은 삶을 마감하며 그동안 도움을 준 이웃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떠난 말기 암 환자의 이야기다. 댓글 중에는 글을 읽고 돌아가신 부모님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렸다는 독자도 몇 사람 있었다. 연출자가 연극이 끝나고 관객이 눈물 훔치는 모습을 볼 때 비로소 극을 무대에 올린 보람을 느꼈다고 하던데 그 이야기에 어느 정도 공감이 갔다.

글을 읽으며 코끝이 찡해지는 것은 흔치 않은 경험이지만 나 역시 오래전 영화화한 소설 『러브스토리』를 읽고 그러한 감동을 경험했다. 소설은 주인공이 숨을 거두며 남아있는 사람을 위로한다는 내용이다. 저자 에릭 시걸도 원고를 탈고한 후 자신의 글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미루어 짐작하건대 시걸이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아무리 소설이라도 작가가 감동할 수 없다면 독자도 감동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서운 사람은 아무 불평 없이 조용히 떠나는 고객이다. 경험에 의하면 이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사진 pxhere]

무서운 사람은 아무 불평 없이 조용히 떠나는 고객이다. 경험에 의하면 이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사진 pxhere]

글을 기고하면 독자의 반응이 궁금해서 간혹 댓글을 살펴보는데 솔직히 그렇게 많은 사람이 기사에 관심을 가질지 몰랐다. 댓글 중에는 기사에 공감하는 글도 있고 반면 차마 말로 옮기기 거북한 글도 있다. 뉴스에 의하면 자신의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고 충격을 받아 자살하는 연예인도 있었다. 댓글로 마음이 상해 앞으로 글을 쓰지 않겠다는 필자도 있다고 한다.

어찌 보면 바쁜 시간을 쪼개어 댓글로 관심을 표명하는 독자야말로 사실 필자에게는 더없이 고마운 사람이다. 일전에 금융회사에 근무할 때다. 창구에 와서 불평을 털어놓는 고객이 가끔 있었다. 어떤 경우는 좀 황당할 때도 있지만 대개 회사의 고객서비스가 모자람을 지적하는 내용이다. 이런 불평은 창구서비스를 개선하는 데 꼭 필요하다.

그들은 불평할지언정 회사와의 거래를 끊지는 않는다. 그만큼 애정이 있기 때문이다. 무서운 사람은 아무 불평 없이 조용히 회사를 떠나는 고객이다. 경험에 의하면 이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댓글도 마찬가지다. 읽기에 불편한 내용도 있지만 그런 시각도 있을 수 있구나 하며 여러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한 자신의 한계를 깨닫는다.

연예인이 글이나 말에 상처를 받아 목숨을 끊기도 하지만 기업가나 정치가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다. 오래전 대우건설 사장을 역임한 남상국은 서울대를 졸업한 후 1974년 평사원으로 대우그룹에 입사해 1999년 사장직에 올랐다. 2003년에는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금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그가 노무현 대통령의 형에게 제공한 뇌물수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고 있을 때다. 하루는 노무현 대통령이 기자회견 석상에서 그의 이름을 거론하며 비판하는 것을 듣고 그 직후 한강에 투신한다.

그로부터 얼마 후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했다. 이번에는 검찰의 수사망이 자신에게 좁혀오자 그 역시 마을 뒷산에서 뛰어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평범한 사람이 아니고 국가지도자까지 지낸 인물이라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그도 자신이 평생 쌓아 올린 도덕적 이미지에 흠집이 가는 상황을 좀처럼 인정하기 어려웠을 터이다. 다만 그는 자신의 잘못을 누구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그가 살아 있었으면 현 정부에 많은 조언을 해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법정 스님은 돌아가시면서 그가 펴낸 책을 모두 절판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의 생각이 자칫 다른 사람에게 잘못 전달될까 우려했던 것 같다. [중앙포토]

법정 스님은 돌아가시면서 그가 펴낸 책을 모두 절판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그의 생각이 자칫 다른 사람에게 잘못 전달될까 우려했던 것 같다. [중앙포토]

어느 경우는 말이나 글로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기에 부족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걸 받아들이는 사람도 상대방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게 어렵긴 마찬가지다. 그 나름대로 또 타인의 말을 각색해 해석하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오해가 싹틀 수도 있다. 그래서 글 쓰는 사람은 늘 이런 점을 염려한다. 이해인 수녀도 그의 시에서 아래와 같이 적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중략)/매일 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슬기로운 말의 주인이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여!/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소서.

시인의 말처럼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오히려 침묵하는 편이 나을 때도 있다. 불교에 ‘염화미소’란 일화도 있듯이 말이나 글로서는 뜻한 바를 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법정 스님은 돌아가시면서 아예 그가 펴낸 책을 모두 절판하라고 유언을 남겼다. 스님이 세상에 있을 때라면 몰라도 운명한 후에 그의 생각이 자칫 다른 사람에게 잘못 전달이 될까 우려했던 것 같다.

작가에게 글쓰기만큼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도 없다. 그러면서도 글쓰기를 계속하는 것은 전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분명 자신의 글을 남들이 읽어주기를 바라고 썼을 것이다. 그런데 한편 부끄러워 내 글을 남들이 읽지 말았으면 할 때도 있다. 그럴 때 독자가 그에게 격려의 말을 전해줄 수 있다면 아마 그는 용기백배해 더욱 좋은 글을 쓰려고 노력할 것이다. 물론 비판의 글도 필요하다. 다만 그저 냉소적인 글보다는 진정성이 담겨있는 글이었으면 좋겠다.

아름다운 인생학교 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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