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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조 땅 팔아 독립자금 댄 이석영 선생 뜻, 남양주서 찾는다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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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경기도 곳곳이 땅 투기 대상이 된 시대지만, 111년 전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의 한 선비는 집안 땅을 남김없이 팔아 치우고 있었다. 제 식구 배 불리려는 게 아니었다. 오로지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항일독립운동의 초석인 신흥무관학교 설립 자금을 댄 이석영(1855~1934) 선생 일가의 이야기다.

이 선생은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직후인 1910년 12월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났다. 땅을 팔아 만든 전 재산을 신흥무관학교 설립에 희사했다. 그때 판 땅이 남양주 화도읍 가곡리 일대라고 한다. 남양주시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가치로 2조원이 넘는 규모다.

역사체험관 ‘리멤버 1910’

이국땅 상하이에서 두부 비지로 연명하던 이 선생은 79세에 영양실조로 타계했다. 아직 그의 묘소도 찾지 못하고 있다. 111년이 지난 지금, 남양주시는 이 선생 일가의 희생과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한 아픈 역사를 기억하기로 했다. 26일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 소재 조선왕릉 홍유릉(사적 제207호) 앞에 개관하는 역사체험관 ‘리멤버 1910(상처 그리고 다짐)’과 ‘이석영 광장’이다.

조광한 남양주시장이 지난 22일 역사체험관 ‘리멤버 1910’에 조성한 친일파를 재판하는 역사 법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형물은 왼쪽부터 이회영, 이석영, 이시영 선생. 남양주시

조광한 남양주시장이 지난 22일 역사체험관 ‘리멤버 1910’에 조성한 친일파를 재판하는 역사 법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조형물은 왼쪽부터 이회영, 이석영, 이시영 선생. 남양주시

개관식이 열리는 26일은 안중근 의사 순국 111주기이기도 하다. 1910년은 경술국치, 이석영 선생의 중국 망명 등이 벌어진 해다. 그 아픈 역사를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게 역사체험관의 설립 취지다.

고향 떠난 지 111년 만에 ‘이석영 광장’ 조성

남양주시 역사체험관 ‘리멤버(REMEMBER) 1910’과 ‘이석영 광장’이 들어선 자리에 있었던 옛 예식장 건물. 지난 2019년 3월 26일 철거 모습이다. 남양주시

남양주시 역사체험관 ‘리멤버(REMEMBER) 1910’과 ‘이석영 광장’이 들어선 자리에 있었던 옛 예식장 건물. 지난 2019년 3월 26일 철거 모습이다. 남양주시

남양주시는 이곳이 일제 침탈의 한을 간직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입구라는 점에 착안, 이 시설을 조성했다. 홍릉은 조선 제26대 고종 황제와 비(妃) 명성황후가 합장된 조선왕릉이다. 고종의 국장(國葬)은 3·1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고, 명성황후는 일본 자객에 의해 시해됐다. 유릉은 조선 제27대 순종과 비 순명효황후, 계비 순정효황후의 능이다.

빈 예식장 건물 철거 후 조성  

남양주시는 “빈 예식장 건물이 9년째 방치돼 홍유릉 입구를 가리며 조선왕릉의 전경을 해치고 있다”는 지역주민들의 민원에 주목했다. 조광한 시장은 그 땅을 매입해 역사체험관을 겸한 이석영 광장을 조성키로 했다. 2019년 3월 건물을 철거하고 일대 1만4000㎡ 부지에서 착공했다. 역사체험관은 지하 2층, 지상 1층, 연면적 3716㎡ 규모다. 1층이 이석영 광장이고, 지하에 역사체험관이 있다. 2019년 1월부터 2단계 공사가 완료되는 올해 말까지 도비 45억원과 시비 433억원을 투입한다.

경기 남양주시는 역사체험관 ‘리멤버 1910’에 친일파 수감 감옥을 설치했다. 남양주시

경기 남양주시는 역사체험관 ‘리멤버 1910’에 친일파 수감 감옥을 설치했다. 남양주시

역사체험관에는 역사 법정, 친일파 감옥, 미디어 홀, 콘퍼런스 룸 등이 마련됐다. 역사 법정은 친일파를 재판하는 공간이라는 의미가 있다. 3명의 판사석이 있고 그 아래 검사석, 변호인석, 피고인석, 방청석이 있다.

판사석에는 이석영 선생과 그의 동생인 아나키스트 이회영 선생, 초대 부통령을 지낸 이시영 선생의 조형물이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학생들이 판사, 검사, 변호사 등으로 역할을 나눠 친일파를 법정에 세운 뒤 가상 재판을 열어 단죄하게 된다.

조광한 남양주시장이 역사체험관 ‘리멤버 1910’에 조성한 친일파 징벌방에서 매국노에게 태장을 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남양주시

조광한 남양주시장이 역사체험관 ‘리멤버 1910’에 조성한 친일파 징벌방에서 매국노에게 태장을 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남양주시

쇠사슬에 묶인 이완용 조형물도

친일파 감옥은 법정 바로 옆에 있다. 안중근 의사 등 독립투사들이 수감됐던 중국 뤼순 감옥과 서대문 형무소도 재현했다. 감옥 한 곳에는 쇠사슬에 묶인 채 엎드려 있는 모습의 친일파 이완용의 조형물을 설치했다. 체험객들이 곤장을 칠 수 있도록 했다.

미디어 홀에는 이석영 선생 형제와 신흥무관학교 관련 자료가 전시됐다. 다목적홀과 카페 등도 조성돼 매월 1회 인문학 강좌와 영화감상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주말마다 문화 공연도 열린다. 올해 말 마무리 되는 이석영 광장에는 표지석과 6개의 돌이 설치된다. 이석영 선생 6형제가 나라를 되찾기 위해 결의를 다지는 모습을 상징한다.

지하에 설치된 역사체험관 ‘리멤버 1910’으로 내려가는 계단 벽에 남양주 출신 독립운동가 10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남양주시

지하에 설치된 역사체험관 ‘리멤버 1910’으로 내려가는 계단 벽에 남양주 출신 독립운동가 102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남양주시

조 시장 “새 시대 다짐하는 역사문화 공간”  

조광한 시장은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한 치욕스러운 역사는 3·1절이나 광복절 등 특별한 날에만 기억해서는 안 된다”며 “이곳이 우리 민족의 가장 치욕스러운 경술국치를 잊지 않고 지난날의 아픈 상처를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다짐하는 역사문화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조 시장은 “역사 법정은 학생들이 직접 검사와 변호사가 돼 을사오적 등 친일파의 죄상을 이해하고, 대한독립의 의미와 올바른 역사의식을 수립할 수 있는 체험공간 역할을 할 것”이라고 소개했다.

역사체험관 ‘리멤버 1910’ 배치도. 남양주시

역사체험관 ‘리멤버 1910’ 배치도. 남양주시

개관식에서는 뮤지컬 ‘안중근 누가 죄인인가’ 등 일제 만행 관련 영상이 상영된다. 1910년 고난의 망명길을 의미하는 수묵화 퍼포먼스도 진행한다. 역사 법정에서는 피고인 이완용에 대한 가상 재판이 열리고 친일파 감옥에 수감되는 장면도 연출한다. 개관을 기념한 주말 행사도 연다. 27일엔 ‘역사·문화도시 남양주’를 주제로 인문학 콘서트가 열리며, 28일까지 이틀간 영화 ‘암살’과 ‘밀정’이 상영된다.

전익진 기자 ijj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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