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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가영의 시선

‘선거중립내각’을 아십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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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가영
이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지난 3월 3일 서울시선관위 관계자들이 성북구 대왕기업 택시차고지에서 서울시장 보궐선거 홍보물을 붙이고 있다. 홍보문구의 색깔이 민주당 상징색을 떠올린다는 비판이 일자 선관위는 결국 부착했던 홍보물을 모두 수거했다. 선거는 다음달 7일이다. [연합뉴스]

지난 3월 3일 서울시선관위 관계자들이 성북구 대왕기업 택시차고지에서 서울시장 보궐선거 홍보물을 붙이고 있다. 홍보문구의 색깔이 민주당 상징색을 떠올린다는 비판이 일자 선관위는 결국 부착했던 홍보물을 모두 수거했다. 선거는 다음달 7일이다. [연합뉴스]

 1992년 10월 임기말의 노태우 대통령은 거국 중립내각을 꾸린다. 지지율이 10%대로 폭락하자 교육자인 현승종을 새 내각의 얼굴(국무총리)로 세웠다. 여당 인사들을 돌려보내고 전문가 위주로 장관 자리를 채웠다. 대선을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엄정 중립에 대한 요구가 높던 시절, 그해 8월 터진 한준수 충남 연기군수(한상혁 방통위원장의 선친)의 ‘관권 선거’ 폭로가 중립내각 구성의 시발점이 됐다. 같은해 3월 치러진 14대 총선에서 여당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공무원 조직이 동원됐다는 내용이었다. 거국중립내각을 국면전환용 쇼라고 깎아내리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권위주의 정권으로 비판받은 노태우 정부도 선거 직전엔 ‘중립’이란 명분을 의식했단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노태우,대선 목전 중립내각 꾸려 #문 정부선 여당 의원이 주무 장관 #선관위도 편파 시비,'신관권'논란

 21대 총선을 몇달 앞둔 2019년말 자유한국당(국민의힘 전신) 황교안 대표는 선거중립 내각 구성을 요구했다. 당시 신임 총리와 법무부 장관에 각각 정세균ㆍ추미애 의원이 지명된 상황에서다. 선거 주무 부처인 행안부의 장관은 진영 의원이 맡고 있었다. 선거관리의 핵심 보직을 모두 여당 의원들이 맡게 되자 야당은 “공정선거는 물건너갔다”고 비판했다. 그러나 야당의 중립내각 구성 요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정세균-추미애-진영 라인으로 21대 총선은 치러졌다.
4ㆍ7 재·보궐선거는 정세균 총리-박범계 법무부 장관-전해철 행안부 장관 편대가 관리한다. 세상이 다 아는 문재인 대통령의 최측근 전해철 장관이 포함된 만큼 지난해 총선 때와 비교해 ‘친문’의 색채가 더 강해졌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는 “거국중립 내각까지는 바라지도 않지만 과거에도 선거 때가 되면 여당 소속 장관들은 교체해 정부가 중립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는 인상을 심어주려 했다”며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선거를 코앞에 두고 선거 관리 주요 부처의 장관들을 모두 여당 의원들로 채웠다. 중립은커녕 신 관권 선거란 생각마저 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당 출신 의원들이라고 모두 중립적이지 않다는 건 편견일 수 있다. 하지만 문재인 정권 들어 유독 정부ㆍ여당이 선거 승리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 왔기에 중립성에 의문을 표하는 시각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지난해 총선 직전의 코로나19 재난지원금 전국민 지급, 이번 재·보선을 앞둔 시점의 대규모 추경 예산 편성 및 부산 가덕도신공항 건설 발표 등이 모두 표를 의식한 행보란 건 정치권의 공통된 인식이다.
요즘 들어 이런 논란을 더욱 키우는 기관이 있다. 바로 선거관리위원회다. 선관위는 공정과 중립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다. 그런 선관위가 지난해 총선, 이번 재·보선 국면에서 자꾸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결정을 내놓고 있다.
선관위는 최근 서울시장위력성폭력사건공동행동(공동행동)이 계획한 ‘보궐선거 왜 하죠? 우리는 성 평등한 서울을 원한다"는 문구의 캠페인을 "선거법 위반"이라고 판단했다. ‘선거일 전 180일부터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설물 설치를 금지한다’는 선거법 90조의 위반 소지가 있다는 거다.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추행 사건 피해자의 기자회견을 주최했던 공동행동은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가 허용되느냐"며 반박했다.
선관위는 이에 앞서 문재인 대통령이 가덕도신공항 예정부지에서 “가슴이 뛴다”고 말한 데 대해선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고 밝혀 야당의 반발을 불렀다. 또 투표 독려를 위해 서울시내 택시에 붙인 홍보물 문구의 색상이 민주당 상징색과 비슷하다는 비판에 부닥쳤다. 처음엔 “자세히 보면 다르다”고 버텼지만 결국 모두 회수해 예산낭비란 지적까지 받았다. 또 서울시장 후보 야권 단일화를 요구하는 신문광고를 낸 시민을 주말에 사업장으로 찾아가 조사하는 무리수를 둬 편파 시비에 휘말렸다. 지난해 총선 때는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후보들의 ‘민생파탄’ 구호는 불허하고, 민주당 후보들의 ‘적폐ㆍ친일청산’ 현수막은 허용해 이중잣대란 비아냥을 들었던 선관위다.
서울·부산시장 선거가 포함된 4·7 재·보선에 여야는 사활을 걸었다. 여권은 대통령이 국토부 장관과 경남지사 등을 대동해 신공항 예정부지를 찾아 부산 표심을 자극하고, 노골적인 돈 풀기에 나서고 있다는 비판에 귀를 닫고 있다. 총선 관리 주무 부처 장관도 죄다 민주당 의원들로 채웠던 인사들 머릿속에 '선거중립내각' 이란 개념이 들었을 리 만무하다. 이변이 없다면 내년 대선 관리의 주무 장관(박범계·전해철 장관)도 모두 여당 의원이 맡게 될 테다. 선거 중립의 최후 보루가 돼야 할 선관위는 편파 시비에 휘말린 지 오래다. 현 집권세력이 "군사독재정권"이라고 비판했던 그 정부에서도 볼 수 없던 이상한 일이다. 논설위원

이가영 논설위원

이가영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