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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치페이'서 '학원페이'로…‘상품권 유통 플랫폼’된 제로페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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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서울시 양천구에 사는 박모(46)씨는 지난해 제로페이 앱을 처음 깔았다. 세금으로 구매가격의 10%를 보조해주는 서울사랑상품권을 사서 학원비 결제에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박씨는 “학원비 부담을 10% 줄일 수 있는 셈이라 50만원 씩 두차례 구매해 학원비를 결제했다”며 “일인당 구매액 제한이 있어 다른 자치구에 사는 친구들끼리 상품권 품앗이도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내 한 전통시장에서 주민이 제로페이로 결제를 하고 있다. 제로페이 결제액은 지난해 1조원을 넘어섰지만, 이중 85%가 지역사랑상품권 등의 정부가 할인판매한 상품권이 차지했다.

서울시내 한 전통시장에서 주민이 제로페이로 결제를 하고 있다. 제로페이 결제액은 지난해 1조원을 넘어섰지만, 이중 85%가 지역사랑상품권 등의 정부가 할인판매한 상품권이 차지했다.

정부와 서울시가 중소상인의 결제 수수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내놓은 간편결제시스템 ‘제로페이’가 지역사랑상품권 등 각종 상품권을 유통하는 플랫폼으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유통된 지역사랑상품권의 상당액이 학원비에 사용되면서 "세금으로 사교육비를 보조했다"는 비판도 나온다. '제로페이'가 '학원페이'로 불리는 이유다.

소상공인 수수료 절감 목적 실종, 상품권 판매소된 제로페이 

국민의힘 윤창현 의원실이 중소벤처기업부와 한국간편결제진흥원 등에서 받은 자료를 따르면, 지난해 제로페이의 결제건수는 3262만여건, 누적 결제금액은 1조761억원으로 집계됐다. 결제액수로만 보면 2019년(767억원)에 비해 14배 늘었다.

하지만 이런 양적 성장은 각종 상품권 결제 증가에 따른 ‘착시 효과’란 지적이다. 제로페이의 원래 기능인 직불결제액은 1657억원으로 2019년(649억원)에 비해 2배 가량 늘어나는 데 그쳤다. 대신 코로나19 확산 속 지난해 각 지자체별로 10% 할인 판매한 지역사랑상품권과 온누리상품권 결제액이 전체 결제액의 85%(8105억원)를 차지했다.

학원에만 1823억원 결제…세금으로 사교육비 보전

상품권이 끌어올린 제로페이 결제액.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상품권이 끌어올린 제로페이 결제액.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업종별로 제로페이가 많이 사용된 곳은 소매업(4545억원)과 음식점업(2397억원), 학원업(1823억원) 등이었다. 결제액이 큰 폭으로 늘어난 곳은 소매업과 학원업이다. 동네슈퍼마켓 등 소매업은 전체 결제액 대비 비중이 2019년 30.9%에서 지난해 42.2%로, 학원업은 같은 기간 10.5%에서 16.9%로 증가했다. 반면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음식점의 결제 비중은 39.5%에서 22.3%로 줄었다.

소매업과 학원 등에서 제로페이 사용이 늘어난 데는 지역사랑상품권이 있다. 대형마트에서는 지역사랑상품권을 사용할 수 없는 탓에 제품군이 겹치는 슈퍼마켓 등이 수혜를 입은 것이다.

학원의 경우 이른바 '학원페이'의 인기몰이로 결제액이 늘었다. 지역사랑상품권을 10%가량 할인 판매할 때 구매한 뒤 학원비 결제에서 사용하는 것이다. 지난해 8월 말 기준 학원가가 몰려 있는 대치동이 위치한 강남구의 경우 지역사랑상품권의 43.9%가 학원 업종에서 사용됐다.

제로페이 어디서 결제했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제로페이 어디서 결제했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학원비로의 쏠림현상이 생기며 지난 3월부터 매출 10억원 이상의 대형 입시학원에서 상품권 사용이 제한됐지만 소규모 학원의 경우 여전히 사용이 가능하다.
제로페이 도입 취지와 다른 왜곡 현상은 정부의 개입에 따른 부작용이란 지적이다. 지역사랑상품권은 사용처가 제한돼 있어 할인 등의 혜택이 없으면 사실상 자발적으로 구매하지 않는다. 한국지방행정연구원의 연구에 따르면 할인율이 7%는 넘어야 구매하겠다는 응답이 절반을 넘어섰다. 실제로 상품권을 할인가에 살 수 있게 되면서 학원비 지출을 줄이려는 수요가 가세하며 사용이 늘어난 것이다.

문제는 각종 상품권 할인에 정부와 지자체의 예산이 들어가는 데 있다. 지난해 지역사랑상품권 9조6000억원 어치를 할인 판매하는 데 지원된 정부 예산은 6690억원이다. 지자체별로도 쓴 예산은 별도다. 올해에도 지역사랑상품권 15조원을 발행하기 위해 정부 예산 1조522억원이 책정됐다.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학원비는 지역사랑상품권을 주지 않아도 지출할 비용이기 때문에 추가적인 소비 진작 등의 효과는 거의 없다"며 "사교육비에 10%를 국가에서 보전해준 것밖에 안 돼 결과적으로 재정 낭비가 됐다"고 말했다. 소비가 새로 늘어난 게 아니라 현금ㆍ신용카드에서 지역사랑상품권으로 결제수단만 바뀌었다는 취지다.

윤 의원은 “관(官)이 선수로 나선 '관선 금융'에 수백억원의 국민혈세를 쏟아부어 상품권 유통망을 만들어 준 셈”이라며 “없앨 수 없다면 소비자 편리성은 높이고 소상공인의 결제수수료 부담을 줄일 수 있는 제로페이 시즌2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홍찬 서울시 제로페이담당관은 “상품권이 제로페이 성장의 촉매가 된 건 맞다"면서도 "소비자들의 결제 습관이 서서히 바뀌고 있는데다, 향후 후불결제도 추진해 선불과 직불, 후불로 결제 인프라를 모두 갖춰 자생력을 확보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제로페이는 없다, 건당 세금 539원

제로페이에 세금 얼마나 투입됐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제로페이에 세금 얼마나 투입됐나.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수수료 제로인 제로페이 자체에 들어가는 세금도 만만치 않다. 2020년 한해에만 서울시와 중소기업벤처부 예산 176억원이 사용됐다. 지난해 결제건수(3262만건)로 보면, 결제 건당 539원의 세금이 들어간 셈이다. 2018년 이후 제로페이에 들어간 예산은 총 352억원이다. 올해에도 서울시와 중기부 등 2곳에서만 180억6000만원의 예산이 책정돼 있다.

은행들도 결제건수에 따라 금융결제원에 수수료 명목의 회비를 낸다. 2019~20년 은행들이 결제건수 681만건에 대해 낸 회비는 41억원으로, 결제 건당 604원꼴이다. 규모가 작은 은행의 건당 수수료 부담은 더 크다. 산림조합중앙회는 결제건당 8만5850원을, 제주은행도 결제건당 4만8220원을 냈다.

언제까지 관치 페이 먹힐까…“지금이라도 민간에 넘겨야”

제로페이가 진출한 간편결제 시장은 핀테크ㆍ빅테크와 기존 금융권이 각축을 벌이는 곳이다. 소비자와 접점이 넓어 이용자를 빨리 확보할 수 있는데다 사용가치가 높은 구매 데이터를 쌓을 수 있어서다. 경쟁이 치열한 만큼 성장도 빠르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카카오페이와 네이버페이 등 간편결제 업체들의 일평균 결제 건수는 2019년 332만건에서 지난해 731만건으로 늘었다.

이런 간편결제 시장에서 세금이 뒷받침하는 제로페이에 대한 시선은 곱지 않다. 여당은 아예 제로페이를 운영하는 한국간편결제진흥원을 중기부 산하에 두도록 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예산은 물론 정보 제공 등 각종 혜택을 줄 법적 근거를 만드는 차원이다.

간편결제 업계 관계자는 “세금을 먹고사는 제로페이에 어떤 혁신과 성장 지속성이 있는지 모르겠다”며 “정부는 민간 영역은 민간에 두고, 다른 일에 집중하는 게 나을 것 같다”고 말했다. 카드업계 관계자도 “가맹점 수수료 인하와 매출세액공제 등의 영향으로 실질적인 카드 수수료도 이미 제로에 수렴하고 있다”며 “정부가 수수료 명목으로 세금을 들여 자생력 없는 결제 플랫폼을 밀어주고 있는 셈”이라고 했다.

김상봉 한성대 경제학 교수는 “민간이 효율적으로 하는 결제 시장에 정부가 뛰어들어 비효율을 만들고 있다”며 “지금이라도 제로페이를 민간에 완전히 넘기고 정부는 완전히 손을 떼는 게 맞다”고 말했다.

안효성 기자 hyoz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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