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상언의 시시각각

브레이브걸스, 시대정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4면

이상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걸그룹 '브레이브걸스'의 멤버들. 은지(왼쪽부터), 유정, 유나, 민영. [중앙포토]

걸그룹 '브레이브걸스'의 멤버들. 은지(왼쪽부터), 유정, 유나, 민영. [중앙포토]

오후 4시에 장사 시작이라고 네이버에 쓰여 있길래 문을 밀고 들어갔는데 5시부터 손님을 받는다고 했다. 20분이 남아 있었다. 기다리기로 했다. 곧 뒤로 네 명, 두 명의 청년이 골목길에서 대기하기 시작했다. 직원은 재료 준비에 필요한 시간이 늘어나 영업 개시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며 미안해했다. 손님이 불어나 미리 손질해 놓아야 할 게 많다는 뜻이었다. 가게 입구 옆에는 포장용지 등이 담긴 상자가 잔뜩 쌓여 있었고, 문 옆에는 아르바이트 직원 구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선행 알려지자 '돈쭐' 나는 치킨집 #'별의 순간' 선물 받은 착한 걸그룹 #상식 믿는 시민들의 세상 바로잡기

선행이 알려져 ‘돈쭐(돈으로 혼쭐)’이 나고 있다는 치킨집 철인7호 홍대점의 그제 모습이다. 1번 손님으로 포장 주문을 하고 기다리던 15분 사이 7개의 테이블 중 4개가 찼다. 직원에게 물으니 요즘 하루에 100건 이상 배달 주문이 온다고 했다. 치킨 봉투를 들고 나가다 주인 박재휘씨와 마주쳤다. 장을 보고 온 듯했다. “바빠져 힘들겠네요”라고 말을 붙였더니 31세 청년 사장이 “감사한 일이죠. 열심히 해야죠”라고 답했다.

이미 널리 알려진 박씨 스토리를 요약하면 이렇다. 1년 전쯤 고교생·초등생 형제가 5000원을 들고 가게 앞에서 서성거렸다. 박씨는 형제에게 공짜 치킨을 대접했고, 이후 혼자 찾아온 동생에게 몇 차례 더 닭을 내줬다. 동생을 미용실로 데리고 가 덥수룩한 머리를 깎게 해주기도 했다. 형은 최근 이 사연을 적은 편지를 철인7호 본사에 보냈다. 그 내용이 공개된 뒤 주문이 폭주했다. 치킨은 받지 않겠다면서 배달 결제만 한 사람도 많았다. 박씨는 그렇게 생긴 돈에 자기 돈을 보태어 구청 복지과 등에 기부했다. 앞으로는 배달이 가능한 주문만 받겠다고 선언했다. 시민들은 “돈쭐이 덜 났다”고 아우성이다.

박씨처럼 행운 벼락을 맞은 사람이 또 있다. 걸그룹 ‘브레이브걸스’의 멤버 네 명이다. 4년 전에 내놓은 노래가 최근 방송사 음악 프로그램 여섯 곳에서 모두 1위를 차지했다.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해 해체 직전까지 몰렸던 그룹이 꿈꿔온 ‘별의 순간’을 잡았다. 현역 군인과 갓 제대한 청년들이 유튜브를 통해 모은 응원이 기폭제가 됐다.

이들의 뒤늦은 성공 요인으로 여러 가지가 꼽히는데, 분석자들은 공히 인성적 측면을 거론한다. 브레이브걸스는 군 위문공연을 총 62회 했다. 왕복 12시간 걸리는 백령도 부대에 다녀온 적도 있다. 군 공연 출연료는 일반 행사 출연료에 한참 못 미쳐 비용을 빼고 나면 남는 게 없고, 그래서 신인이 아니면 다들 꺼린다고 한다. 브레이브걸스가 마지못해 했을 수도 있지만 성실성은 인증된다. 이들이 부대에 가면 악수ㆍ사인 등의 팬 서비스를 열심히 했다는 증언도 많다. 평균 나이 30.5세가 된 걸그룹이 요즘 예능 방송 섭외 1순위다. 꾸밈없는 진솔한 말로 인기를 더 얻는다.

한 청년은 인터넷 언론에 이렇게 썼다. ‘군 시절 우리들은 좀처럼 뜨지 못하는 브레이브걸스에게 일종의 동지애를 느꼈던 것 같다. (중략) 어쩌면 진부할 수도 있는 이 고진감래(苦盡甘來) 서사에 모두가 열광하는 것은 멤버들의 땀과 눈물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에….’ 같은 곳에 다른 청년은 ‘우리는 열심히 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과 가장 괴리된 세상에서 아직도 그 드라마를, 신화를 꿈꾸고 만들고 있는 것 아닐까. 열심히 노력한 사람이 그 결과로 성공해 기쁨을 누릴 수 있도록 우리는 하나의 드라마를 만들어 주려는 것이 아닐까’라고 적었다.

주옥같은 문장이 넘쳐나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에는 ‘상식대로 해야 이득을 보는 세상을 만들겠습니다’는 대목도 있다. 착한 사람, 성실한 사람,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 잘되는 나라를 말했다. 4년이 흘렀다. 편법과 부정을 일삼은 자가 되레 큰소리치고, 약삭빨라야 편히 사는 가치 전도의 폐단이 공고해졌다. 이 악의 구렁텅이에서 시민들이 스스로를 구하고 있다. 홍대 치킨집과 브레이브걸스에 쏟아진 성원이 그 증거다.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

이상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