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 못믿어 3주 밤샜다, 등기 600건 뒤진 '자칭 국정원'

중앙일보

입력 2021.03.24 05:00

지면보기

종합 02면

원삼주민통합대책위원회 팀장 4명은 최근 한 달간 동네 일대 등기부등본이나 토지대장 600건을 열람했다. 사무실 불이 새벽까지 매일 켜져 있으니 인근 주민들이 먹거리를 가져다줬다고 한다. 맨 오른쪽이 박지영 위원장. 사진 대책위

원삼주민통합대책위원회 팀장 4명은 최근 한 달간 동네 일대 등기부등본이나 토지대장 600건을 열람했다. 사무실 불이 새벽까지 매일 켜져 있으니 인근 주민들이 먹거리를 가져다줬다고 한다. 맨 오른쪽이 박지영 위원장. 사진 대책위

“우리끼리는 국정원 요원이라고 최면을 걸면서 3주 넘게 밤을 새웠어요.”
국가정보원처럼 정보를 수집하며 밤잠을 반납했다는 이는 원삼주민통합대책위원회(이하 대책위)의 박지영 위원장이다. 원삼면 일대는 SK반도체클러스터 일반산업단지 예정지다. 이곳 주민들은 최근까지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일대의 토지 거래 내용 600건을 조사했다.

반도체클러스터 일대 땅투기 조사
대책위 “SNS·동문홈피까지 살펴”
LH직원·공무원 등 의심 50건 찾아
“수사기관이 끝맺음해 줬으면”

“시 못 믿어서” 직접 나선 주민들 

원삼대책위 등이 지난 18일 용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합뉴스

원삼대책위 등이 지난 18일 용인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합뉴스

각자 생업이 있는 박 위원장 등 대책위 4명이 퇴근 후 사무실에 모여 매일 오전 3시까지 마을 일대의 부동산 등본이나 토지 대장을 하나하나 열람했다. 출력에만 1주일, 조사에는 3주가 걸렸다. 주민들이 자기들의 터전에 땅 투기를 한 의심 사례를 직접 조사한 것이다. ‘전국 최초’인 일을 왜 했느냐고 묻자 박 위원장은 “용인시가 하는 자체조사를 믿을 수 없으니까요”라고 답했다. 이들은 조사 결과를 지난 18일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경찰에도 넘기지 않았다.

대책위는 투기 의심 사례를 잡기 위해 주민공람일(2019년 3월 29일) 전후인 2017~2019년 원삼면 일대 토지 거래 명세를 살펴봤다고 한다. 앞으로 땅값이 크게 오를 수용지 경계선 1㎞ 안팎의 땅 600곳이 대상이었다. 이후 원주민이 샀다거나 자체적으로 걸러낼 사례는 뺐다. 그렇게 남은 건 80건. 박 위원장은 “경기도·경기도의회·경기도시공사·용인시·용인시의회·용인도시공사·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이름을 다 입력한 엑셀 명단을 만들었다”며 “이 명단을 바탕으로 80건을 살펴봤더니 그 중 LH 직원으로 의심되는 거래 내용 30건, 시청 공무원과 사업시행사 측 직원으로 의심되는 거래 20건을 추려냈다”고 말했다.

동명이인도 걸러내야 했다. 박 위원장은 “이름이 똑같을 수 있으니까 인물 검색을 한 번 더 했어요. 예를 들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나 동문 홈페이지를 봤을 때 학번이 나오면 수능을 다섯 번 보지 않는 이상 유추되는 나이가 있잖아요. 그런데 토지 대장에서 비슷한 생년월일이었다면 10% 이상 가능성이 있다고 봤죠.”

“피수용민 희생 투기꾼들이 더럽히면 안 돼” 

18일 오후 반도체클러스터 산업단지가 들어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일대 모습. 연합뉴스

18일 오후 반도체클러스터 산업단지가 들어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일대 모습. 연합뉴스

주민 제보가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박 위원장은 “‘집 근처에 누가 땅을 샀는데 그 사람이 어디 직원이라더라’ 식의 주민 제보가 들어오면 도움을 많이 받았다”며 “자체 조사와 제보라는 두 가지 방법으로 접근하면서 꼬인 실타래를 풀어갔다”고 말했다.

용인시는 지난 18일 반도체클러스터 등 관내 사업부지 관련 공직자의 부동산 투기 전수조사 결과 투기의심 정황이 있는 3명을 경찰에 수사 의뢰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박 위원장은 “공무원뿐 아니라 반도체클러스터의 설계와 감리를 맡은 업체, SK 측의 담당 직원, 원삼면사무소 공무원 등으로 투기조사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사범위와 방법을 바꾸면 더 많은 투기 의심 사례를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경기도 반도체 특구 업무를 맡았던 전직 공무원의 아내가 설립한 법인이 원삼면 일대 땅을 매입해 투기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다.

박 위원장은 “과정은 고됐지만, 결과는 뿌듯하다”고 말했다. “경찰 수사를 촉구하고, (권력이) 눈치 보게 하는 효과가 있어서 큰 실적을 얻었다고 본다”면서다. 박 위원장은 수사기관의 강도 높은 수사를 지켜보겠다고 했다. 그는 “강제수용이 국가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면 피수용민이 희생하는 게 맞지만, 그 희생이 투기꾼들에 의해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 우리의 터전을 내놓는데 적어도 비리는 없어야 한다는 절박한 마음에 조사를 시작했고 수사기관이 그 끝을 맺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채혜선 기자 chae.hyeseo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