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월간중앙] 독점분석 | 램지어 파문이 드러낸 일본 극우 ‘장학생’의 실체

중앙일보

입력

“위안부는 매춘부” 주장한 램지어 교수, 일본 우익 후원받고 논리 개발 참여
막대한 자금과 로비력으로 세계 정치권과 학계 인맥 통해 日 극우 주장 전파

2020년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우익단체 회원들이 구 일본군 제복을 입고 만세 삼창을 하고 있다.

2020년 8월 15일 야스쿠니 신사 앞에서 우익단체 회원들이 구 일본군 제복을 입고 만세 삼창을 하고 있다.

위안부 논쟁이 재점화했다. 발화지는 국내가 아니라 미국이다. 존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의 논문이 도화선이 됐다. ‘일본군 위안부는 매춘부’라는 그의 주장은 일본 극우 진영의 논리 그대로다. 램지어 교수 논쟁은 일본 극우의 치밀한 ‘친일 학자 육성 프로젝트’의 단면을 보여준다. 

日 우익이 연출한 역사왜곡의 꼭두각시들

"일본군 위안부는 성매매를 강요당한 성노예가 아니며, 이익을 위해 일본군과 계약을 맺고 매춘을 했다.”

램지어 교수가 쓴 논문의 한 대목이다. ‘태평양 전쟁의 성매매 계약(Contracting for sex in the Pacific War)’이라는 제목의 논문은 국제 학술지인 [국제법경제리뷰(International Review of Law and Economics, IRLE)] 3월 호 게재를 앞두고 있다. 국제 학술계에서 비판이 터져나왔다. 하버드 대학원생들은 성명서를 내고 램지어 교수가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잔혹 행위의 심각성을 축소했다고 비판했다. 위안부 피해자인 이용수 할머니와 화상으로 만난 알렉시스 더든 코네티컷대 역사학과 교수는 “증거가 정직하지 않거나 증거가 없다면 학문의 자유를 누릴 수 없다”고 했다.

일본 학계와 시민단체도 비판적이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학술 사이트를 운영하는 일본의 시민단체 ‘파이트 포 저스티스(Fight for Justice)’는 3월 14일 램지어의 위안부 논문을 비판하는 온라인 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에는 일본사연구회, 역사학연구회, 역사과학협의회, 역사교육자협의회 등 일본 내 학술단체들이 참여했다. 위안부 연구의 권위자로 꼽히는 요시미 요시아키 주오대 명예교수는 “램지어 교수가 위안부 계약에 대해 논하면서도 계약서를 한 점도 제시, 검토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오노자와 아카네 릿쿄대 교수는 “램지어의 논문은 사료적 근거 없이 주장하고 있어 학술논문으로서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창기와 위안부 제도의 실태를 논하고 있다고 도저히 말할 수 없다”고 혹평했다.

“위안부는 매춘부” 램지어 주장에 국제 학계 비판 봇물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닌 매춘부’라는 주장을 편 논문으로 파문을 일으킨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 / 사진:하버드 로스쿨 유튜브 캡처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닌 매춘부’라는 주장을 편 논문으로 파문을 일으킨 마크 램지어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 / 사진:하버드 로스쿨 유튜브 캡처

일본 극우 진영은 램지어 비호에 나섰다. 일본의 극우 역사학자 6명은 램지어 교수의 논문이 실릴 학술지와 편집인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램지어 교수의 논문이 미국에서 최근 확산하고 있는 온라인 따돌림 문화의 대상이 됐다”며 “질책을 받을 게 아니라 칭찬받아야 할 위대한 성취”라고 주장했다.

램지어 교수는 일본과 남다른 인연이 있다. 그는 청소년기를 일본에서 보냈다. 하버드대 로스쿨을 졸업한 뒤 도쿄대에서 장학생으로 학업을 마치고 하버드 교수로 임용됐다. 전공은 역사가 아닌 일본법과 기업법이다. 교수로 임용된 뒤에는 일본의 전범 기업 미쓰비시로부터 학술지원을 받았다. 하버드 로스쿨 홈페이지에는 ‘미쓰비시 일본 법학 교수’로 소개돼 있다. 미쓰비시는 [산케이] 신문과 ‘새로운 역사 교과서를 만드는 모임’ 등 극우 성향 단체들을 후원하고 있다.

2018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욱일중수장’을 받기도 했다. 그가 발표한 논문들은 일본의 전쟁범죄를 은폐하고 극우 세력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논리적 근거로 활용됐다. 지난 1월 일본 매체에 기고한 글에서 “위안부가 성노예였다는 것은 순전한 허구”라고 주장했다.

2019년에도 “1923년 간토 대지진 때 조선인이 광범위한 범죄를 저지른 것은 사실이며, 일본 자경단이 죽인 조선인 숫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는 내용이 담긴 논문을 발표한 적 있다.

램지어 교수와 함께 미국에서 일본 극우의 논리를 전파하는 대표적 인물은 제이슨 모건 일본 레이타쿠대 교수가 있다. 미국 루이지애나주 출신인 모건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공산주의를 응징하기 위해 미국과 전쟁을 벌였다는 주장을 편다.

국내에서도 램지어 교수를 옹호하는 이들이 나타났다. 조 필립스 연세대 언더우드국제대 부교수와 조셉 이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는 2월 18일 미국의 외교전문 매체 [더 디플로매트(The Diplomat)]에 ‘위안부와 학문의 자유에 대하여’라는 글을 공동 기고했다. 두 사람은 이 글에서 “일본과의 개인적인 연관성을 이유로 램지어의 학문적 진실성을 공격하는 것은 비생산적이며 외국인 혐오로 들린다”며 “램지어의 글에 한국의 시각이 결여됐다고 비난하는 것은 상대를 반한(反韓) 혹은 친일(親日) 부역자로 규정하는 피해자 중심적인 한국의 관점을 전제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우연 낙성대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일본의 한 온라인 매체에 실린 기고문에서 “한국의 반일 민족주의자들이 위안부 강제 연행설의 증거로 내세우는 건 위안부들의 증언뿐”이라고 주장했다. 이 연구위원은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교장)와 함께 [반일종족주의]를 썼다.

‘국제 협력’ 명분 삼아 日 우호 인적 네트워크 축적

일본이 위안부와 강제징용의 책임을 부정하며 역사를 뒤집으려는 시도를 전방위로 벌이고 있다. 2018년 10월 시민단체 회원들이 일본의 침략 전쟁과 범죄행위 사과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사진:뉴시스

일본이 위안부와 강제징용의 책임을 부정하며 역사를 뒤집으려는 시도를 전방위로 벌이고 있다. 2018년 10월 시민단체 회원들이 일본의 침략 전쟁과 범죄행위 사과를 요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 사진:뉴시스

호사카 유지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교수는 국내외 친일 성향 학자들의 논리적 밑바탕에 일본 극우세력이 숨어 있다고 주장한다. 호사카 교수는 “일본의 극우세력은 다양한 경로와 방식으로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외국 학자들을 은밀히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 극우 진영에 우호적인 학자들을 지원함으로써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저질렀던 전쟁 범죄를 은폐하고 저들의 침략 전쟁을 정당화하는 데 학자들의 연구 성과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램지어 교수가 오랫동안 미쓰비시 학술지원을 받아오면서 일본을 두둔하는 왜곡된 역사관을 전파하는 것도 이런 극우 전략의 일환이란 게 호사카 교수의 지적이다. 미쓰비시가 1970년대 이후 하버드대에 낸 후원금 규모는 수천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내에서도 일본 극우세력이 일본에 우호적인 인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1995년 사사카와 료이치가 설립한 사사카와평화재단(SPF)의 아시아 연구기금 출연 논란은 한국 사회에 스며든 일본 극우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었다. 총자산 3000억 엔에 달하는 일본 최대 규모의 공익재단인 사사카와평화재단은 세계 각국에 다양한 형태로 기금을 조성해 공익사업을 지원하고 있다. 세계 유수의 싱크탱크에 대한 지원사업이 가장 비중이 높다.

일본 우익의 해외 인적 네트워크 형성 작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일본으로 유학하는 장학생을 선발해 학부에서 석사·박사에 이르기까지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방식이 있다. 또 국내 대학에 국제 교류 등을 명목으로 직접 기금을 출연하기도 한다.

일본 유학 정보 제공업체인 ㈜일본대학교 정보센터에 따르면 일본의 기업이나 민간단체가 유학생에게 지급하는 장학금 종류는 388개에 달한다.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한 장학금이 258개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대학생 장학금은 105가지 종류가 있다. 평균 월 지급액은 7만4600엔(한화 약 77만원)으로 학위 등급에 따라 지원금액이 달라진다.

각 장학재단의 세부 정보가 나와 있지 않아 일본 내 우익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찾기는 어렵다. 다만 그중에는 일본 우익단체를 후원하는 아사히나 전범기업으로 꼽히는 히타치, 미쓰비시, 사사카와평화재단 등 널리 알려진 기업과 단체 이름을 단 장학금도 여럿 확인된다. 한국에 사무소를 운영하는 곳도 상당수다. 그만큼 한국 유학생에 대한 높은 관심을 방증한다. 대개 ‘문화 교류’ ‘우호’ ‘국제 협력’ 등의 기치를 앞세우지만, 자금에 대한 정보가 차단돼 있어 순수성과 목적을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국내 대학에 직접 지원하는 경우는 사사카와평화재단이 대표적이다.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국내에서 국립대와 사립 명문대 등 10여 개 부설 연구소에 연간 수십억원 규모로 장학금과 연구비를 지원했다. 사사카와평화재단은 전 세계 50여 개 대학의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급하는, 이른바 ‘사사카와 리더’ 육성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영향력 행사자(Agents of Influence)]의 저자인 팻 코에이트는 1990년대에 이미 “일본이 워싱턴을 매수하고 있다”고 폭로했다. 일본 우익이 막대한 자금을 동원해 국제 정치·외교가와 학계에 로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사카와평화재단은 1995년 연세대와 합의해 10억 엔 규모로 아시아연구기금을 출연했다. 재단 측이 사업 내역을 공개한 2015년까지도 아시아연구기금을 사용해 한일 관계 연구를 진행했다. 고려대도 1987년 사사카와평화재단에서 지원금을 받아 ‘사사카와 영 리더 장학금’을 만들었다가 논란이 됐다. 일부 교수는 재단 측의 연구비 지원 제안을 받아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에서 논란이 일자 2015년 이후로 지원 현황을 일체 공개하지 않고 있다. 재단이 마지막으로 공개한 2015년 한국에서 진행한 지원 사업은 22개 사업, 17억8600여만 엔에 달한다.

일본 극우단체 후원받아 한 해 20여 차례 오가기도

사사카와평화재단(SPF) 설립자인 사사카와 료이치 이사장(왼쪽)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SPF는 지미카터재단을 비롯해 세계 주요 정치인과 학자들을 후원하고 있다.

사사카와평화재단(SPF) 설립자인 사사카와 료이치 이사장(왼쪽)과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SPF는 지미카터재단을 비롯해 세계 주요 정치인과 학자들을 후원하고 있다.

일본 극우세력이 외국인 유학생을 지원하는 목적은 사사카와평화재단 설립자의 아들인 사사카와 요헤이 이사장이 1990년 12월 [월간 아사히]와 나눈 인터뷰를 통해 엿볼 수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유학생 지원 목적을 이렇게 설명했다. “중요한 것은 다음 세대를 겨냥하는 젊은이들에 대한 접근이라는 점이다. 장학생 전원을 데이터베이스에 입력하고 있다. 50개 대학에서 매년 1000명 정도 졸업생이 나오는데 10년이면 1만 명이다. 그중 30%가 전문가나 파워 엘리트가 된다면 이것은 대단한 네트워크다. 단추만 누르면 어떤 인맥을 통해야 할 것인가가 순식간에 파악된다.”

사사카와평화재단 외에 일본의 대표적인 출판기업인 분게이슌주(文藝春秋)도 극우 논리를 전파할 학자들을 지원하는 활동을 펼친다. 분게이슌주가 지원한 일본의 대표 극우 인사로는 니시오카 쓰토무 교수(모라로지연구소)가 있다. 니시오카는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연구자의 선두주자로 꼽힌다. 니시오카를 중심으로 극우 학자 20여 명이 최근 램지어를 지지하는 성명서를 냈다. 이영훈 전 교수가 쓴 [반일종족주의]는 분게이슌주를 통해 일본어판이 출간됐다. 호사카 교수는 “니시오카가 쓴 책에는 분게이슌주가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기 위해 무제한으로 돈을 내겠다고 한 내용이 나온다”고 말했다. 분게이슌주는 아베 정권을 거치면서 극우로 선회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영훈 전 교수와 [반일종족주의]를 공동집필한 이우연 박사(낙성대경제연구소)의 경우 2019년 7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유엔 인권이사회 정기회의에 참석할 당시 항공료와 체류 비용을 일본의 극우단체 ‘국제역사논전연구소’에서 지원받았다. 이 박사는 당시 회의에 참석해 “조선인 노무자들의 임금이 높았고, 전쟁 기간 자유롭고 편한 삶을 살았다”며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주장을 펼쳤다. 그의 발언은 [산케이] 신문 등 일본 보수 언론을 통해 확대 재생산되면서 논란을 일으켰다.

낙성대경제연구소는 뉴라이트 경제사학자인 안병직 서울대 교수와 이대근 성균관대 교수가 1987년에 공동 설립한 단체다. 낙성대연구소는 연구비와 재정지원을 도요타재단에서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국내에서 식민지 근대화론의 이론적 토대를 쌓아온 대표적인 친일 성향 연구단체로 평가받는다.

일본 극우세력이 학자를 지원하는 방법은 너무 은밀해서 잘 노출되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극우세력의 제안을 받았다가 거절한 이들의 증언을 통해 그 과정을 어느 정도 가늠할 수는 있다. 저서 출간이나 연구에 필요한 경비와 자금을 지원하는 방식이 주를 이룬다.

특히 저명한 국내 학자들은 일본 현지에 초청을 받아 강연하는 방식의 지원을 받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일본에 가서 극우의 주장을 옹호하는 내용의 강연을 하면 이를 일본 극우단체와 언론들이 논리적 근거로 삼으면서 자기들의 주장을 확대 재생산하는 방식으로 이용한다. 호사카 교수는 “한국의 학자가 위안부를 매춘부라고 말하면 자기들(일본 우익)이 주장하는 것보다 훨씬 눈에 띄고 객관적으로 인식되는 점을 노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중국 관련 전문가로 꼽히는 국내 대학의 한 교수는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기 전 일본 정부로부터 초청을 받았다고 한다. 일본 정부 관계자들 앞에서 비공개 강연을 해 달라는 요구였다. 이 교수는 “대부분의 강연이 일본 현지에서 비공개로 진행되다 보니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국내 학자의 연구 활동이나 외부 강연 등을 지원하는 데에는 일본 극우세력뿐만 아니라 정부 기관인 외무성, 공안, 내각조사실 등도 나선다고 한다. 한 국내 교수는 1년에 20여 차례씩 일본을 오가며 일본에서 강연 활동을 한 경우도 있을 정도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학장)가 쓴 [반일종족주의]는 일본 우익 성향 출판사인 분게이슌주(文藝春秋)의 지원을 받아 일본어판을 출간했다. 도쿄 대형서점에서 판매 중인 [반일종족주의] 일본어판.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이승만학당 학장)가 쓴 [반일종족주의]는 일본 우익 성향 출판사인 분게이슌주(文藝春秋)의 지원을 받아 일본어판을 출간했다. 도쿄 대형서점에서 판매 중인 [반일종족주의] 일본어판.

일본 ‘군대 부활’ 명분 쌓으려는 치밀한 전략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평화헌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군대를 부활하려는 일본 우익의 시도가 본격화했다. 자위대 해병대가 욱일기를 들고 도열해 있다. / 사진:로이터/연합뉴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가 평화헌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군대를 부활하려는 일본 우익의 시도가 본격화했다. 자위대 해병대가 욱일기를 들고 도열해 있다. / 사진:로이터/연합뉴스

램지어 교수 등 외국 학자들이나 국내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의 주장은 대부분 일본의 위안부 성노예 만행이나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쪽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는 일본 극우세력이 가장 감추고픈 사실이기 때문이라는 게 호사카 교수의 분석이다.

1993년 고노 담화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공식적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첫 사례였다. 이후 고노 담화는 위안부 문제에 관한 일본의 공식 입장으로 굳어져왔다. 그러나 아베 정권이 들어서면서 입장이 180도 바뀐다. 2014년 아베 신조 당시 일본 총리는 “일본이 국가 차원에서 성노예로 삼았다는 중상이 세계에 진행되고 있다”며 위안부 문제의 책임을 부정하는 뜻을 밝혔다.

아베 정권의 이런 태도 변화가 일본 우익이 위안부 문제와 강제동원을 부정하는 여론을 조성하고 논리적 근거 개발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학계는 분석하고 있다. 자민당 극우세력의 지원을 받아 만들어진 역사검토위원회나 새역사교과서를만드는모임, 일본회의 등이 이런 활동의 중심 역할을 했고, 극우 성향 기업인과 단체가 이들을 후원했다.

일본 극우세력은 왜 세계를 무대로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가며 이런 활동을 벌이는 걸까. 호사카 교수는 “위안부 문제가 일본 우익이 꿈꾸는 최종 목표를 달성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일본 극우세력의 단기 목표는 군대를 부활하는 것이고, 최종 목표는 역사에서 자신들이 저지른 전쟁범죄 기록을 소멸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베 전 총리는 2017년 5월 헌법 개정을 촉구하면서 “헌법 9조 3항에 자위대 보유를 명기하는 방향으로 국민적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앞서 일본은 2015년 9월 집단 자위권 행사를 정당화하는 관련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했다. 헌법에 군대 보유를 명시함으로써 일본군 부활을 임기 안에 마무리하겠다는 속내를 드러낸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일본은 헌법 9조에 ‘일본은 군대를 갖지 않으며 전쟁을 포기한다’고 명시해 군대를 보유할 수 없도록 했다. 그래서 일본의 헌법을 ‘평화헌법’이라고 부른다. 다만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이를 구실로 경찰 예비대를 창설하고 사실상 군대나 다름없는 자위대로 개편했다. 2019년 기준 일본의 군사력은 세계 6위 수준이다.

일본이 공식적인 군대를 갖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국제사회의 반대 여론이다.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 공방이 아직도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나치가 저지른 전쟁범죄를 인정하고 피해자와 국제사회에 사죄의 뜻을 반복해서 밝히고 있는 독일과 다른 점이다.

외국의 램지어 비판에도 침묵하는 한국의 학자들

호사카 교수는 “일본군이 저지른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 내부와 국제사회가 범죄로 인식할 경우 자위대를 일본군으로 바꾸는 건 사실상 불가능해진다. 그래서 위안부의 불법성을 감추고 ‘자발적 매춘부’라고 주장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본 극우세력의 장기적인 목표는 일본이 침략 국가가 아니었다고 역사적 평가를 바꾸는 것”이라고 호사카 교수는 덧붙였다. 이어지는 그의 설명이다. “유럽의 경우 독일 때문에 일본 극우의 주장이 안 먹힌다. 그러니 유럽보다 미국을 계속 공략하는 거다. 미국에는 수십 년 전부터 엄청난 로비 자금이 들어가 일본에 우호적인 인사를 꾸준히 양성하고 있다.”

일본 극우세력의 이러한 치밀한 전략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한다. 반복적인 메시지가 노출될 경우 처음에는 관심 없던 대중도 이를 어느 정도 사실로 인식하게 될 가능성을 노리는 것이다. 논란을 키움으로써 ‘위안부는 성노예’라는 기존의 인식을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닐 수 있다’는 식으로 바꿈으로써 불법성을 희석하고 논쟁의 여지를 열어두는 전략으로 풀이할 수 있다. 일본 극우 활동가들의 대중운동과 친일 지식인들이 개발한 논리적 근거가 결합해 위안부나 강제 동원 문제를 논쟁적 이슈로 몰아가는 것이야말로 일본 극우세력이 바라는 구도라는 것이다.

실제로 친일 학자들이 위안부와 강제동원 등의 문제에 관한 공개토론을 요구하는 것도 이런 맥락으로 풀이된다. 니시오카 쓰토무나 이영훈 전 교수 등이 대표적이다. 일본 극우 네티즌들이나 국내 친일 성향 언론들이 “공개 토론에 응하지 않는 게 성노예설이 거짓이라는 방증”이라고 공격하는 것도 같은 이유다. 램지어 교수를 옹호하는 일부 학자들이 학문의 자유를 내세워 논쟁을 시도하는 것도 크게 보면 논쟁적 이슈로 몰고 가려는 기획된 전략의 일환이라는 게 일본 극우와 대립하는 진영의 입장이다.

하지만 위안부나 강제동원 문제를 바라보는 국내 학술계의 태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높다.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국내 학술계는 일치된 목소리를 내기보다 관망하는 쪽을 택했다. 현재도 정의기억연대를 비롯한 시민사회 진영이 앞장서 램지어 교수를 비판하고 있을 뿐, 국내 역사학계나 여성학계는 별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고 있다. 한국사 강사인 황현필씨는 자신의 유튜브 채널 [황현필 한국사]를 통해 “세계 석학들은 반박을 하는데 우리 역사학계, 강당 사학자들은 찍소리도 안 한다”고 비판했다.

위안부 활동을 지원하는 주무부처인 여성가족부는 램지어 교수의 논문 내용을 파악하고도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여가부는 2월 16일 공식 입장을 통해 ‘위안부 피해자에 대한 명예훼손 사례에 대해 매우 유감이며 재발하지 않기를 바란다’며 짧게 논평했다. 3일 뒤 정영애 여가부 장관은 국회 상임위에서 논문 자체에 대응한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이처럼 소극적인 우리 정부와 지식인들의 태도에 대해 호사카 교수는 “좀 더 단호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일본 극우세력이 유도하는 논쟁의 함정을 경계하되, 보편적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는 치밀한 논리 개발에 더 힘을 쏟아야 한다는 조언이다. 호사카 교수는 “일본 극우세력의 주장은 왜곡돼 있지만, 정치권과 사회운동권, 학계가 체계적으로 역할을 분담하고 상당히 치밀한 논리를 갖췄다”고 했다. 그는 “성노예설을 주장하는 쪽은 기본적인 개념이 말끔히 정리돼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곤 한다”며 “일본이 어떤 논리를 개발하고 있고, 극우세력이 어떤 움직임을 보이는지 파악이 되질 않으니 저들의 논리에 대응하는 데 있어 맹점이 많다”고 했다. 호사카 교수의 말처럼 국내 역사학계는 공창설과 성노예 설이 맞서고 있다.

한국 정부가 나서서 일본 극우 야욕 차단해야

2월 24일 부산 동구 일본영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62차 부산 수요시위 참가자들이 램지어 교수와 일본의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 사진:송봉근 기자

2월 24일 부산 동구 일본영사관 앞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62차 부산 수요시위 참가자들이 램지어 교수와 일본의 사과를 촉구하고 있다. / 사진:송봉근 기자

극우세력을 은밀히 지원하는 일본 정부와 달리 위안부 문제를 시민사회 진영에 사실상 맡겨버린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는 아쉬운 부분이다. 정부가 독도 문제에 관해 학술활동을 지원하고 국제사회의 공조를 끌어내기 위해 외교력을 발휘하는 것과 비교할 만하다. 박근혜 정부 때 일본과 맺은 위안부 합의도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게 만드는 걸림돌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지금이라도 장기 전략을 갖고 일본 극우세력에 대응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위안부와 강제동원 문제가 단순히 피해자의 명예회복 차원을 넘어 일본의 군국주의 야욕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서울 소재 대학교의 한 역사학 교수는 “윤미향 사태로 인해 정의기억연대의 활동이 위축된 것도 램지어 사태에 국내 위안부 관련 활동가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이유”라며 “학술적 연구와 공론화 작업을 민간에 모두 맡기기보다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국제사회의 연대를 강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호사카 교수는 “위안부 문제를 내주면 일본 극우세력이 저들의 야욕에 한 걸음 다가서게 만드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동안 일본 극우세력이 보여준 태도에 비춰볼 때 호사카 교수의 경고는 예사롭지 않다. “일본의 극우는 유엔의 견해나 오바마의 서명도 뒤집을 기세다. 한국의 대응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이런 논쟁은 앞으로 더 많아질 거다. 저들의 목적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