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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예영준의 시시각각

이름이 잘못되면 일을 망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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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예영준 기자 중앙일보
예영준 논설위원

예영준 논설위원

싱가포르 북ㆍ미 정상회담의 여운이 가시지 않던 2018년 10월 베이징에서 있었던 일이다. 싱가포르 다음 수순을 주목하던 해외 언론들의 관심이 군사 분야 국제회의인 샹산(香山)포럼에 쏠렸다. 모처럼 북한 대표단이 참석해 공개 발언을 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송일혁 조선군축평화연구소(외무성 산하기구) 부소장은 싱가포르 합의문에 적힌 ‘한반도 비핵화’의 의미를 친절하게 ‘해석’해 주었다. “조선반도 비핵화는 전체 조선반도의 비핵화를 말한 것이다. 남북이 함께 비핵화를 실현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예상보다 진실의 순간이 빨리 다가올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북한 비핵화' 명기 못한 한·미 2+2/ 국제사회에서 덜 당당하다는 /정의용 장관의 진의는 무엇인가

그해 12월 조선중앙통신의 논평은 더욱 상세했다. “6ㆍ12 조ㆍ미 공동성명에는 분명히 ‘조선반도 비핵화’라고 명시돼 있지 ‘북 비핵화’라는 문구는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우리의 핵 억제력을 없애는 것이기 전에 조선에 대한 미국의 핵 위협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제대로 된 정의다.” 여기서 말하는 미국의 핵 위협 제거란 직접적으로는 핵우산 공약의 파기를 말한다. 이는 북한이 미사일 도발을 할 때마다 한반도로 날아오는 전략폭격기 등 전략자산 반입 금지와 한ㆍ미 연합훈련 중지로 연결된다. 궁극적으로는 주한미군 철수로까지 이어지는 요구다. 이런 요구가 충족되지 않는 한 ‘북한 혼자만의 비핵화’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한반도 비핵화’는 북한 마음먹기에 따라 언제든지 비핵화 합의에 어깃장을 놓는 핑계로 활용할 수 있다. 실제로 북한은 6자회담의 틀이 살아 있던 2007년 무렵 핵시설 사찰 수용과 검증 합의를 재촉하는 미국에 맞서 “남북 동시 사찰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다. 사실상의 사찰 거부였다. 그 논거가 바로 “전 한반도의 비핵화를 합의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영변 원자로의 동결과 불능화 단계까지 갔던 합의는 사찰ㆍ검증의 고비를 넘지 못하고 백지화되고 말았고, 그렇게 시간을 번 북한은 줄곧 핵무장 고도화의 길을 달렸다.

로이드 오스틴(왼쪽부터) 미국 국방장관,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 정의용 외교부 장관, 서욱 국방부 장관이 18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한?미 외교?국방 장관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서울=뉴시스]

로이드 오스틴(왼쪽부터) 미국 국방장관,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 정의용 외교부 장관, 서욱 국방부 장관이 18일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한?미 외교?국방 장관 공동기자회견을 하고 있다.[서울=뉴시스]

바이든 행정부가 ‘완전한 북한 비핵화’란 용어를 공식화하기 시작한 건 대북정책 재검토 과정에서 이런 사실을 잘 간파했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의 강력 반발을 무릅쓰고서라도 처음부터 새로운 대북정책의 목표 지점을 분명히 하고 동맹국들 간에 공유하겠다는 전략을 분명히 한 것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다. 쿼드 4개국(미국ㆍ일본ㆍ호주ㆍ인도) 정상회의에서도, 미ㆍ일 ‘2+2 회담’에서도 공동성명에 명기됐던 ‘북한 비핵화’가 한국의 차례에 와서 쏙 빠진 것이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국제사회에서 더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기 때문에 한반도 비핵화란 표현이 더 올바른 표현”이라고 말했다. 기존의 국제 합의, 즉 9ㆍ19 공동성명이나 싱가포르 공동성명에 ‘한반도 비핵화’란 용어가 들어가 있음을 환기시킨 발언 아닌가 싶다. 그런데 어떤 용어는 왜 더 당당하고, 어떤 용어는 덜 당당하다는 건지 해독이 잘 안 된다. 한반도 비핵화의 핵심이 북한 비핵화란 사실은 국제사회의 상식이다. 그런데도 ‘북한 비핵화’를 주장하면 덜 당당해진다는 건 무슨 말인가. 북한이나 중국이 미국의 핵우산을 못마땅해하니 그 앞에선 당당하게 ‘북한 비핵화’를 주장할 수 없다고 말했다면 차라리 솔직한 표현이었을까.

외교 협상에서 작은 난관을 극복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 해석의 길이 여러 갈래로 열려 있는 모호한 용어를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때로 있지만 본질적인 용어의 뜻은 분명해야 한다. 전략적 모호성이 영원히 지속될 순 없다.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비핵화의 개념이 지금 그런 순간에 도달해 있다. 논어 자로편은 공자 가르침의 핵심인 정명론(正名論)을 이렇게 설파한다. “이름이 바르지 못하면 말이 순리에 어긋나고, 말이 순리에 어긋나면 일을 이루지 못한다(名不正則言不順, 言不順則事不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