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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워실의 바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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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경제·산업디렉터

서경호 경제·산업디렉터

욕실에서 처음 물을 틀면 찬물이 나온다. 진중하게 조금 기다리면 될 것을 그걸 못 참고 온수 쪽으로 손잡이를 크게 돌리니 이번엔 너무 뜨겁다. ‘앗 뜨거워’ 하며 손잡이를 반대로 돌리면 다시 냉수가 쏟아진다. 비명을 지르고 샤워실을 뛰쳐나가기 십상이다.

부동산 정책 실패에 LH 투기까지 #분노 정당하나 신도시 철회 안 돼 #속 시원할수록 비용 많이 치러야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말한 ‘샤워실의 바보’ 얘기다. 경기에 대한 섣부른 판단으로 정부가 시장 개입을 하면 역효과를 낸다는 경고인데, 분위기에 휩쓸려 대증요법을 남발하는 바보는 거시정책에만 있는 게 아니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태에 대한 분노가 커지면서 정부와 정치권과 여론도 냉·온탕을 오간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3기 신도시를 철회해 달라’는 청원이 올라왔고 11만 명 넘게 동의했다. 문재인 정부의 정책 실패로 주택가격과 전·월세 값이 다락같이 올라 ‘전·월세 난민’과 ‘벼락 거지’를 양산하고 있는 와중에 공공부문에서 평등하지도, 공정하지도, 정의롭지도 않은 투기가 드러났다. 안 그래도 국민은 울고 싶은데 제대로 뺨을 맞은 격이다.

부동산 정책의 실패로 문재인 정부는 총체적으로 낙제점을 면하기 힘들어졌다.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은 지난해 초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다른 거 다 성공해도 부동산에 실패하면 꽝”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정부는 부동산에 가장 큰 가중치를 뒀지만 시장을 무시한 수요관리 위주의 정책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김상조 실장이 우려했던 ‘참여정부의 트라우마’라는 정책 실패는 반복됐다. 더 고약한 방식으로.

무엇보다 정부와 LH의 잘못이 크다. LH 사태 이후 3기 신도시 일부에서 토지주와 원주민의 반발로 사업이 중단됐다. 서울 30만 가구, 전국 80만 가구라는 매머드급 공급계획을 내놨던 2·4대책도 난기류에 빠졌다. 도덕성이 땅에 떨어졌는데 누가 LH에 토지소유권을 넘기고 공공주도 개발을 맡길 수 있을까. 정세균 국무총리는 11일 “LH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회복 불능으로 추락했다”며 해체 수준의 환골탈태를 거론했다. 토지공사와 주택공사를 힘들게 합병해 출범한 LH를 다시 쪼개는 것 아니냐는 전망이 나왔다. 하지만 정 총리는 19일 “LH를 토지·주택공사로 분리하는 방안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입장을 밝혔다.

서소문 포럼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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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H 해체론을 서둘러 진화한 건 주택 공급의 중추인 3기 신도시 추진에 차질이 빚어질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공급 계획은 예정대로 추진돼야 한다. 직원들이 사적 이익을 추구하지 못하도록 내부 통제를 강화하되, 주택시장에서 LH가 담당했던 순기능은 유지해야 한다. 신도시 택지를 개발하고 공급하는 기능을 다른 누가 당장 대체할 수도 없다.

올해 7월부터 시작되는 3기 신도시 사전청약을 목 빠지게 기다리는 수도권 무주택자가 많다. 사업 추진이 늦어지면 전·월세를 살며 대기해야 하는 기간은 그만큼 늘어난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 사전청약을 했던 일부 보금자리주택 중에 당첨 후 10년 만에 입주한 아파트도 있었다. 주민 반발로 토지 보상이 지연되면서 본청약이 3~5년 늦어져서다. LH가 밉다고 주택공급 계획까지 내동댕이치는 ‘샤워실의 바보’가 돼서는 안 된다.

당정이 공직자의 투기를 막기 위해 재산 등록 대상을 현재 4급 이상 일반 공직자와 7급 이상 경찰·소방 등 일부 공무원에서 모든 공직자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이것도 분위기에 휩쓸린 과잉조치다. 등록 대상이 현재 22만 명에서 공공기관 직원까지 포함하면 150만 명 이상으로 늘어난다. 제대로 관리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고 행정비용만 늘어난다. 차명을 이용한 투기는 잡아낼 수도 없다.

이번에 투기 목적의 농지 구입이 확인되면서 외지인이 쉽게 농지를 살 수 없도록 농지법 규제를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쏟아진다. 헌법에 나와 있는 경자유전(耕者有田) 원칙이 훼손되지 않도록 농사지을 생각이 없는 이들에게 전답이 넘어가선 안 된다. 하지만 일반인의 농지 구입을 과도하게 막으면 결국 고령 농부의 재산권이 침해될 수 있다. 노령화로 농업인구가 줄면서 휴경지는 늘어나는 한편, 주말농장이나 은퇴 후 시골 생활을 원하는 도시민은 많아졌다. 농지의 합리적인 이용이라는 유연함까지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LH 사태에 날 선 비판을 날리되, 분노를 헛되이 탕진하지는 말자. 분노를 잠재우는 속 시원한 대책이 나오면 의심부터 해야 한다. 대개 시원할수록 과도한 규제라는 기회비용은 더 많이 치러야 한다. 그 피해는 대부분 무주택 서민에게 돌아간다.

서경호 경제·산업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