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염 삼킨 태양의 아들, 이근호

중앙일보

입력 2021.03.23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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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6면

13년 만에 대구로 돌아온 이근호. 30대 중반이지만 체력과 투지는 여전하다. [사진 대구FC]

13년 만에 대구로 돌아온 이근호. 30대 중반이지만 체력과 투지는 여전하다. [사진 대구FC]

프로축구 대구FC 팬은 올 시즌을 앞두고 마음이 무거웠다. 공격수 김대원(강원FC)과 데얀(킷치)이 떠났고, 에드가는 아킬레스건 수술로 팀 합류가 늦어졌다. 지난해 20골 8도움을 합작한 세 선수의 부재는 시즌 초반 공격력 약화로 이어졌다. 대구는 개막 후 5경기에서 무승(2무3패)에 그쳤다. 자칫 길어질 수도 있던 부진을 돌아온 베테랑 골잡이 이근호(36)가 끊었다.

친정 대구 컴백한 베테랑 골잡이
전 소속팀 울산 상대 첫 승 이끌어
36세 나이에도 체력·스피드 여전
“무명선수 키워준 팀에 보답할 것”

이근호는 21일 DGB대구은행파크에서 열린 울산 현대와 올 시즌 K리그1(1부) 홈 경기에서 0-1로 뒤진 후반 30분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렸다. 기세가 오른 대구는 후반 추가시간 세징야가 한 골을 더 넣어 2-1 역전승했다. 시즌 첫 승, 그것도 우승 후보 울산을 상대로 거둔 승리라 기쁨이 두 배였다. 홍명보 감독이 새로 지휘봉을 잡은 울산은 ‘홍염 축구(불꽃같은 공격 축구)’를 앞세워 무패(3승2무)를 기록 중이었다.

지난 시즌까지 울산에서 뛴 이근호는 득점 후 세리머니를 하지 않았다. 22일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시즌 첫 선발 출전이었고, 공교롭게도 울산전이라 더욱 간절했다. 골과 승리를 함께 챙겨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어 “올 시즌 공격 포인트 목표는 따로 정하지 않았다. 올 시즌 우리 팀은 리그와 아시아 챔피언스리그를 병행해야 한다.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팀 승리에 기여하는 것만 생각하겠다”고 강조했다.

이근호가 대구 유니폼을 입고 골 맛을 본 건 2008년 이후 13년 만이다. 2004년 인천 유나이티드에서 프로에 데뷔한 그는 3년간 8경기 출전에 그친 무명 선수였다. 2007년 대구로 이적한 뒤 인생이 바뀌었다. 2007~08년 두 시즌간 59경기에 나와 23골(9도움)을 기록했다. 이후 일본 J리그(주빌로 이와타, 감바 오사카)로 이적했고, 챔피언스리그 우승(2012년, 울산)을 이끌며 아시아 톱클래스 공격수로 발돋움했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조별예선 러시아전에선 통쾌한 장거리슛 골을 넣는 등 전성기를 구가했다.  K리그 통산 기록은 303경기 74골 52도움. 당시 대구 팬들은 이근호를 ‘태양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이근호는 “대구는 무명 선수였던 나를 받아주고 키워준 팀이다. ‘태양의 아들’이란 별명은 인터넷 아이디로 사용할 만큼 일상의 일부가 됐다. 대구에서 돌아와 팬들과 호흡할 기회가 생겨 감사하다. 그라운드에서 보답하겠다”고 말했다.

이근호의 장점은 서른 여섯 나이를 잊은 듯한 스피드와 체력이다. 매 경기가 끝난 후 그의 얼굴은 늘 땀 범벅이다. 팬들은 이근호에게 “내일이 없는 것처럼 뛴다”고 칭찬한다. 대구에서 최고참이지만, 투지는 13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10일 3라운드 광주FC전은 이근호의 마음가짐이 드러난 대표적인 경기다. 후반 40분 광주가 역습을 펼치자, 광주 페널티박스 앞 이근호가 대구 골문으로 전력질주를 시작했다. 순식간에 90m를 달려 광주 공격수의 슈팅이 대구 골라인을 넘기 직전 몸을 던지는 슬라이딩으로 간신히 걷어냈다. 당시 전력분석용 카메라로 측정한 이근호의 스피드는 시속 32㎞에 달했다. 노장 이근호의 폭풍 질주 영상은, 프로축구연맹 인스타그램에서 큰 화제가 됐다. 팬들은 투혼에 박수를 보냈다.

이근호는 “팬들 기대가 큰 건 알지만, 13년 전 내 모습은 잊으라 당부했다. 이제는 20대 초반처럼 빨리 뛸 순 없다. 나도 팬들도 전성기 시절에 젖어있으면 안 된다”며 겸손해했다. 그러면서도 “대신 서른여섯 이근호가 잘 할 수 있는 걸 최대한 보여주겠다. 국내외 리그에서 남다른 경험을 쌓았고, 20대 때부터 꾸준히 관리한 체력은 여전히 왕성하다. 올 시즌이 내 축구인생의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후회없는 도전을 하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피주영 기자 akapj@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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