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단독]식품업계 "곡물가 폭등하는데"…정부 "가격인상 말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농림축산식품부가 이달 초 식품업계 고위 관계자 10여명을 불러 가격인상을 자제하라는 협조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각 기업에서는 경영·기획 담당 임원 등 제품 가격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인사들이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정부측 관계자들은 "제품 가격 인상을 최대한 하지 말라"고 당부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식품업체 10곳 불러 '가격 협조' 당부

22일 익명을 원한 한 식품업계 관계자는 “말이 협조 요청이지 실제로는 ‘제품값을 올리지 말라’는 경고였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세계적인 곡물 파동으로 가격이 상승중이고 그에따라 제품 가격 인상 압박이 커지고 있다"며 "그런데 정부가 사실상 가격 통제를 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식품업계에선 최근 한 업체가 제품 가격의 인상을 검토하다 막판에 철회했다. 업계에서는 "정부 눈치를 보다 어쩔수 없이 후퇴한 것"이라는 반응이 나온다.

줄줄이 오르고 있는 먹거리 물가. 올들어 기후 이상과 수요 상승 등이 겹치면서 물가 관리에 비상이 걸렸다. [중앙포토]

줄줄이 오르고 있는 먹거리 물가. 올들어 기후 이상과 수요 상승 등이 겹치면서 물가 관리에 비상이 걸렸다. [중앙포토]

업계, "가격 인상말라는 건 월권"  

식품업계는 "미국의 기록적인 한파 같은 세계적인 기후 이상과 러시아의 곡물 수출세 인상, 중국의 수요 상승 등이 겹쳐 곡물 가격이 치솟았다"고 밝혔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의 세계 곡물가격 동향에서도 곡물가 인상을 확인할 수 있다. 지난해 2월 t당 326달러였던 대두 가격은 지난달 508달러로 뛰었다. 같은 기간 t당 149달러였던 옥수수도 217달러로 올랐다. 시카고 선물거래소(CBOT)에서 지난 1년 사이 선물 거래 가격이 대두는 55.8%, 옥수수는 45.6%가 각각 상승했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식물성 기름인 팜유는 지난해 대비 가격이 두 배가 됐고, 밀가루 가격은 50% 정도 올랐다"며 "당장은 버티지만 앞으로 올리지 않고 버틸 수 있을 지 걱정"이라고 말했다. 식품업계는 보통 3~6개월 치의 원자재를 재고로 보유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 같은 곡물가의 상승이 몇달간 더 이어지면 제품 가격 인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글로벌 곡물 가격 추이.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글로벌 곡물 가격 추이. 그래픽=신재민 기자 shin.jaemin@joongang.co.kr

"기업에 부담 종용해봐야 실효 의문" 

정부가 사실상 가격 인상을 압박하고 나서면서 미리 가격을 올린 업체와 올리지 못한 업체간 희비도 엇갈리고 있다. 국내 두부 시장의 45%를 차지하고 있는 풀무원은 올해 1월 첫째 주에 전국 주요 대형마트에 공급하는 두부와 콩나물 납품 가격을 10~14% 인상했다. 또 1월 말에는 CJ제일제당과 대상도 10~15%가량 납품가를 인상했다. 수입산 밀을 원재료로 사용하는 제과업계도 이미 제품 가격을 올렸다. 뚜레쥬르는 지난 1월 빵 가격을 평균 9% 올렸고, 파리바게뜨도 95개 품목의 가격을 평균 5.6% 인상했다. 대형마트와 편의점 등에서 주로 판매하는 양산빵(일명 봉지 빵)도 지난 10일부터 개당 100~200원씩, 평균 9%씩 올랐다. SPC삼립의 정통 크림빵 대형마트 판매가는 개당 1100원에서 1200원으로 올랐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라면과 과자 등은 가격 인상이 적었다. 이중 라면의 소비자 물가지수 가중치는 2.4, 스낵 과자는 3.0으로 가격 인상이 물가 전반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식품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물가 안정만을 위해 가격을 억누르면 언젠가는 더 큰 폭으로 뛸 수밖에 없다"며 "상품 가격까지 이래라저래라하는 건 월권 아니냐"고 했다.

정광호 서울대 행정대학원 교수는 “선거를 앞두고 최대한 서민 물가를 안정시키려는 정부의 입장은 이해는 하지만, 원재료값 상승에도 불구하고 개별 기업에 부담을 종용하는 방식이 얼만큼 실효가 있을지 의문"이라며 "무조건 찍어누르는 것 보다는 세금 완화 같은 방법을 통해 가격 인상 억제 노력을 지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수기 기자 lee.sooki@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