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하경 칼럼

대통령은 민심 이탈 막을 기회를 놓쳤다

중앙일보

입력 2021.03.22 0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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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이하경 주필·부사장

농지가 수난을 당하는 시대다. 돈 있는 사람들은 농지를 쇼핑하듯 쉽게 사들인다. 한 필지를 쪼개 수십·수백 명이 나누어 갖는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뿐 아니라 대통령 친구의 배우자, 실세 장관의 보좌관, 여당 국회의원들의 이름이 너절하게 등장한다. 힘없고, 정보 없고, 돈 없는 사람들은 절망하고 있다. 농민들은 “투기꾼이 땅값을 올려놔서 정작 우리는 농지를 살 수 없는 세상이 됐다”고 절규한다.

농지 투기는 망국의 유행병
대통령 친구, 장관 보좌관도 가세
투기 조장하고 정권 재창출?
민심·헌법 무시 정권 미래 없어

‘탐욕의 절제’라는 시민적 윤리가 소멸한 공간에는 “너 죽고 나 살자”는 적의(敵意)만 확대재생산된다. 연대의 에토스(ethos)는 사라진 지 오래다. 마침내 인간과 금수(禽獸)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농지 쪼개기의 추악한 역사는 유구하다. 고려 말기에는 ‘일전다주(一田多主)’의 미친 바람이 불었다. 한 뼘의 농토에 권문세가(權門勢家) 일고여덟이 찰거머리처럼 붙어서 피골이 상접한 농민의 고혈(膏血)을 빨았다. 농민들은 살기 위해 도적이 돼 떠돌았다. 당대의 경세가 정도전은 “빈자는 송곳 꽂을 땅도 없다”고 탄식했다. “전 인구의 10분의 5,6은 호적에서 빠져나갔다”(조선경국전)는 기록이 상흔으로 남았다. “아노미의 극한 상황”(『정치가 정도전』 최상용·박홍규)이었다.

이러고도 버틸 정권은 없다. ‘위화도 회군’이라는 반역으로 고려의 숨통을 끊어놓은 이성계 신세력이 착수한 것은 토지제도 개혁이었다. 권귀(權貴)들의 ‘일전다주’를 혁파해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정당성을 거머쥐었다.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조선의 설계자였던 정도전은 “당시의 구가세족(舊家世族)들이 비방하고 원망하면서 방해했다”고 적었다.

전제(田制)는 왕조의 흥망을 좌우하는 마법의 상자였다. 토지제도의 문란으로 망한 고려가 천년왕국 신라를 살해한 명분도 “전제 혼란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신라 말엽에 전제가 고르지 못하고 부세(賦稅)가 무거웠으므로 도적이 군기(群起)하였다. (중략) 태조(왕건)께서 민간에게 3년 동안의 조세를 면해 주었다. (중략) 비록 천하를 호시(虎視)하는 요(遼), 금(金)이 우리와 땅을 연접하였어도 감히 나라를 침범하지 못한 것은…”(『고려사절요』). 민심(民心)은 언제나 천심(天心)이다.

이 정부는 신라, 고려 말기의 혼란상을 반복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부동산 투기로 돈 못 벌게 하겠다”고 했다. 종합부동산세, 양도세 폭탄을 퍼부었다. 그런데 정작 LH 직원들은 내부 정보를 빼내 탈법 투기로 자기 배를 채웠다. 권력자들까지 악취 나는 자본주의의 하수구에 발을 담갔다. 국가와 악당의 차이는 도대체 무엇인가.

문 대통령은 “부동산 적폐 청산을 남은 임기 동안 핵심 국정과제로 삼겠다”고 했다.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다. 김헌동 경실련 부동산건설개혁운동본부장은 “대통령 본인이 적폐의 적통 세력인데 대체 무슨 적폐를 청산하겠다는 것이냐”고 물었다. 대통령은 “큰 허탈감과 실망감을 드렸다”고 사과했지만 진정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사저(私邸) 논란의 당사자다. 퇴임 후에 거처하기 위해 양산에 부지를 사들였다. 일부가 농지인데 ‘영농 경력 11년’이라고 적어 허가를 받았다. 이후 9개월 만에 농지를 대지로 형질변경했다.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허위 기재가 아니다”고 했다. 대통령은 “살기만 할 뿐 처분할 수도 없는 땅”이라고 했다. 대통령의 선의(善意)를 믿고 싶다. 법과 현실의 괴리도 인정한다. 그러나 “싼 농지를 사서 비싼 대지로 바꾼 것은 투기 아니냐”(윤영석 국민의힘 의원)는 날선 비판은 시기가 시기인지라 예사롭지 않다.

베트남 국부(國父) 호찌민은 프랑스 총독 관저였던 주석궁에서 지내다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석 달 만에 배관공 집으로 옮겼다. 문 대통령은 “호찌민을 본받으면 부패가 없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래놓고도 솔선수범의 기회를 놓쳤다. 양산 사저의 규모는 1817평에 이른다. 경호시설을 거론했지만 진정한 경호는 초소의 규모가 아니라 국민의 존경도에 달렸다는 사실을 놓쳤다.

민심이 떠나가고 있다. 한국리서치·코리아리서치·엠브레인·케이스탯 합동 여론조사에서 국민의 73%가 “청와대와 정부의 투기 조사 결과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다. 82%는 “LH 사태가 보궐선거에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표로 심판하겠다는 것이다.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는 “위에는 맑아지기 시작했는데 아직 바닥에 가면 잘못된 관행이 나와 있다”며 “그런 것까지 고치려면 재집권해야 한다”고 했다. 참으로 위대한 정신승리법이다.

농지를 유린하는 투기는 헌법적 가치인 ‘경자유전(耕者有田)’을 부정하는 악행(惡行)이다. 헌법 121조는 “국가는 농지에 관하여 경자유전의 원칙이 달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하며, 농지의 소작제도는 금지된다”고 했다. 농지법 6조 1항은 “농지는 자기의 농업 경영에 이용하거나 이용할 자가 아니면 소유하지 못한다”고 못 박았다. 민심과 헌법을 우습게 아는 정권에 미래는 없다.

이하경 주필·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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