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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정애의 시시각각

어느 대통령도 사저로 못 돌아간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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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2층 양옥에 들어설 때 타임슬립한 듯했다. 1970년대 전형적 양식이어서다. 천장과 벽면을 갈색 나무 합판으로 치장한 거실, 안방에 놓인 자개장, 브라운관 TV까지 영락없었다.

문 대통령 "기존 집 가겠다"더니 #농지전용 논란 자초하곤 외려 화내 #후임 위해서라도 먼저 상의했어야

청와대에서 249일 집무한 최규하 전 대통령의 사저다. 72년부터 76년 총리로 부임할 때까지, 또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80년부터 2006년 서거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소소한 전시물들이 있었다. 80년대 군납했을 정도로 대중적인 담배 한산도도 한쪽을 차지했다. 그가 즐겨 피우다 보니 외국 대사들이 고급 담배인 줄 알고 사 갔다는 사연과 함께였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고 최규하 전 대통령 가옥. 최 전 대통령이 청와대 거주 전후 살았던 곳이다. [뉴스1]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고 최규하 전 대통령 가옥. 최 전 대통령이 청와대 거주 전후 살았던 곳이다. [뉴스1]

문재인 대통령이 여러 차례 “퇴임 후 양산 매곡동 자택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을 때 많은 이가 이런 사저를 상상했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불가능한 꿈이다. 사저의 성격이 달라졌다. 전직 대통령의 위상이 상승한만큼 공간이 바뀌어야 했다. 경호원이 상주할 곳도 필요했다. “있는 그대로 돌아가겠다”고 호언장담했던 YS(김영삼 전 대통령)도 신축해야 했다. 또 인근에 10년 정도 쓸 경호동도 있어야 한다.

정치적 의미도 배가됐다. 전직 대통령이 상처를 추스르고 정치적 재기를 엿보는 근거지로서다. 일종의 ‘사당(祠堂)’일 수 있다. “(대통령) 집무실에서 근무한 사람을 찬양하는 아주 커다란 건물”(『퇴임 후로 본 미국 대통령의 역사』)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DJ(김대중 전 대통령)가 김대중도서관으로 가능성을 열었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경남 봉하마을로 구현했다. 사저와 경호동이 뒤섞인 4261㎡(1289평)의 공간 말이다. 최 전 대통령의 경호원들이 근무하던 곳엔 서교동 주민센터가 들어섰지만 봉하마을에선 둘을 분리하는 게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문 대통령은 대통령비서실장 출신이라 이런 사정을 잘 알 수밖에 없다. 그런 그가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고 약속했을 때, 대충 신축하겠지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스스로 “대통령 돈으로 땅을 사서 건축하지만 경호시설과 결합되기 때문에 대통령은 살기만 하고 처분할 수도 없는 땅”이라고 말한 거로 봐선 ‘노무현 모델’인 모양인데 왕래가 잦은 곳(통도사 인근)으로 넓혀서 옮겼다(현재까지 알려진 것만 6005㎡, 1817평). 대통령 부부가 ‘농업경영’을 하겠다며 농지까지 매입한 게 지난해 4월이었는데, 공교롭게 문 대통령이 격노했다던 ‘문재인 대통령 기록관’이 백지화된 게 그보다 앞선 2019년 하반기였다. 당시 사의를 표했던 대통령기록관장(2급)이 최근 국가기록원장(1급)으로 중용됐다. 대통령의 퇴임 후 욕망이 읽힌다면 오해일까. 씁쓸한 일이다.

그렇더라도 사저 문제에 대해선 우리 사회가 한 번쯤 시야를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문 대통령은 그래도 양산으로 가니 너른 땅을 마련할 수 있다. 수도권 출신에겐 난망한 일이다. 기연미연하겠지만, MB(이명박 전 대통령)가 내곡동으로 가려 했던 건 기존 논현동 사저론 어렵다는 경호처의 뜻도 있었다. 경호동을 지을 장소가 마땅치 않았고 또 엄청나게 비쌌기 때문이었다. DJ·노무현 사저 업무를 보다 퇴직한 경호원을 계약직으로 재고용해 같은 업무를 맡겼는데도 그런 결론에 도달했다고 한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내곡동 땅을 사야 했다. 경호처에선 당시 “서울에선 적절한 가격대의 부지가 제한적”이라고 설명했었다. 옮길 수밖에 없는데, 옮기면 탈이 나는 구조다.

더욱이 앞으론 공동주택에 살다가 청와대에 들어가는 대통령도 나올 것이다(대선주자들 대부분 아파트 거주자다). 이 경우 사저로 돌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정치권에선 농반진반으로 “전직 대통령 타운을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올 정도니 난제다.

문 대통령이 이번에 “좀스럽고 민망한 일”이라고 성낼 게 아니라, 복잡다단한 면에 대해 진솔하게 의견을 구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그게 후임자도 위하는 길이었다. 논설위원

고정애 논설위원

고정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