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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여성 권투 도전기 '파이터' 감독 "손 내미는 듯, 준비 안 된 한국사회 모순"

중앙일보

입력

18일 개봉한 영화 '파이터'(감독 윤재호)는 탈북자 진아가 권투로 새로운 삶에 뛰어드는 내용. 주연 임성미가 이 영화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받았다. [사진 인디스토리]

18일 개봉한 영화 '파이터'(감독 윤재호)는 탈북자 진아가 권투로 새로운 삶에 뛰어드는 내용. 주연 임성미가 이 영화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올해의 배우상을 받았다. [사진 인디스토리]

“탈북한 분 중에 잘된 분도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거든요. 10년 지나도 크게 변하지 않은 환경에 놓인 사람도 있고. 우리 사회가 편견을 깨부수려고 하지 않는 이상 저들의 삶이 나아질 수 없죠. 가장 중요한 건 교육의 문제인 것 같아요.”
18일 개봉한 영화 ‘파이터’에서 20대 탈북자 진아(임성미)의 권투선수 도전기를 담은 윤재호(41) 감독의 말이다. 중국에 아버지를 두고 홀로 한국에 온 진아의 고군분투에 그가 어릴 적 한국에 먼저 도망쳐와 새 가정을 꾸린 어머니(이승연) 사연을 버무려냈다.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 넷팩상(아시아영화진흥기구상), 주연 임성미의 올해의배우상 2관왕을 받고, 이달 초 비대면 개최된 독일 베를린영화제 제너레이션 부문에 초청돼 “분단선이 지도 밖에도 도사린, 분단국가의 한 난민의 운명을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고 호평받았다. 개봉 전 그를 서울 아트나인 극장에서 만났다.

탈북여성 권투 도전 그린 '파이터' #부산영화제 2관왕·베를린 초청 #윤재호 감독 "남과 북 함께하려면 #보여주기식으론 마음 못 열죠" #

이나영의 '뷰티풀 데이즈'와 거울같은 영화 

영화 '파이터'를 연출한 윤재호 감독을 개봉 전 서울 아트나인 극장에서 만났다. 각본을 겸한 그는 "투자가 쉽지 않은 작품이어서 어려움을 겪던 중 제작사인 해그림 대표님이 공동 제작에 참여한 영화 '극한직업'이 잘되면서 영화가 만들어지게 됐다"고 돌이켰다. [사진 인디스토리]

영화 '파이터'를 연출한 윤재호 감독을 개봉 전 서울 아트나인 극장에서 만났다. 각본을 겸한 그는 "투자가 쉽지 않은 작품이어서 어려움을 겪던 중 제작사인 해그림 대표님이 공동 제작에 참여한 영화 '극한직업'이 잘되면서 영화가 만들어지게 됐다"고 돌이켰다. [사진 인디스토리]

분단으로 인한 가족의 생이별과 재회는 그가 꾸준히 다뤄온 주제다. 다큐멘터리 ‘마담B’에선 브로커에 속아 중국 농부에게 팔려갔다가 북한의 가족을 빼내 한국에 오는 데 성공한 탈북여성을 담아 모스크바국제영화제 다큐멘터리상, 취리히영화제 골든아이상 등을 받았다. 단편 ‘히치하이커’는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초청됐고, 배우 이나영이 중국에서 찾아온 아들과 재회하는 탈북자로 주연한 장편 극영화 데뷔작 ‘뷰티풀 데이즈’는 3년 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상영됐다.
‘파이터’는 윤 감독이 2012년 신인 감독의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칸영화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할 때 ‘뷰티풀 데이즈’를 포함한 3부작 중 두 번째로 기획한 작품이다. “‘뷰티풀…’에서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파이터’에 있고 ‘파이터’에서 다루지 않은 이야기가 그다음 작품에 있어요. ‘파이터’와 ‘뷰티풀…’의 인물들은 서로 거울의 반대편 느낌이죠. ‘뷰티풀…’의 엄마(이나영)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놓고 희생했다면 ‘파이터’의 진아는 ‘나는 나야’라고 자신을 지키면서 생존하죠. 어떤 환경이 때려눕혀도요.”

궁지몰려 '욱'하는 주먹, 남북관계 북한 닮아

생계가 막막한 진아에겐 북한 말투만 내비쳐도 되돌아오는 차별이 괴롭다. 자취집을 소개한 부동산 매니저는 기댈 곳 없는 진아에게 성적으로 집적댄다. 남한 사람이 다 된 엄마는 새 남편 앞에선 진아를 아는 척하지 않는다. 윤 감독은 “겉보기엔 손을 뻗는 듯하지만 막상 내부는 아직 준비되지 않은 사회가 한국사회의 모순”이라며 “(북한에) 손 내미는 정부도, 반대하는 단체도 결국은 보여주기식으로 끝난다”고 설명했다.
지켜줄 사람 없는 진아가 위기의 순간 자신을 지키려 본능적으로 주먹을 뻗어 상대를 넉다운시키는 장면이 반복해 나오는 데도 의미가 있다. “일단 진아가 감정적으로 굴곡 있는 캐릭터라 욱하는 행동으로 볼 수도 있고, 상징적으론 남북관계에서 북쪽이 욱하는 것들을 보여주려 했죠.”
권투는 이렇게 꼬일 대로 꼬인 진아의 삶이 조금씩 풀어지는 계기가 된다. 윤 감독은 “권투가 싸움하는 스포츠 중에 규율이 상당히 엄격한 종목이고 주먹만 사용해서 링이라는 매우 협소한 공간에서 해야 한다는 게 탈북한 사람이 처한 사회,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상황과 비유적으로 잘 맞아 떨어졌다. 스스로 극복하고 헤쳐나가야 하는 과정도 진아와 잘 맞았다”고 했다. 또 “아마추어 대회에 가서 받은 거친 느낌을 살리기 위해 카메라가 많이 흔들리더라도 자유롭게 대상을 찍고 시합 장면도 1~3번만 길게 찍고 나머지는 편집에서 판단하려 했다”고 말했다.

'마더' '동백꽃 필 무렵' 배우 임성미의 발견 

첫 주연 장편 '파이터'에서 임성미(사진)는 권투에 도전하는 탈북민 진아 역을 맡았다. 북한말은 영화 속 부동산 매니저로 나오는 연변 출신 이문빈 배우가 집중 코칭했다. [사진 인디스토리]

첫 주연 장편 '파이터'에서 임성미(사진)는 권투에 도전하는 탈북민 진아 역을 맡았다. 북한말은 영화 속 부동산 매니저로 나오는 연변 출신 이문빈 배우가 집중 코칭했다. [사진 인디스토리]

주연 임성미도 빛난다. 권투실력을 타고났단 설정을 위해 한 달 반을 거의 체육인처럼 훈련하며 복싱 다큐, 경기 영상에 빠져 살았단다. 윤 감독이 추천한 영화 ‘로제타’ ‘피쉬탱크’의 고난에 처한 여성들도 참고했다. “복싱기술, 몸 만드는 어려움, 북한억양까지 세 가지를 다 충족해야 했는데 임성미 배우를 만났을 때 ‘이 분이다’ 했다. 내면의 힘, 무언가 안에 꽉 차 있는 느낌을 받았다”고 윤 감독은 돌이켰다. 부산영화제에선 ‘고요한 집중력으로 한 호흡도 지나치지 않고 구현했다’는 심사평과 함께 올해의배우상을 받았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서 여고생 흉터(이미도)의 친구 역으로 얼굴도장을 찍고 ‘검은사제들’의 토대가 된 장재현 감독 단편 ‘12번째 보조사제’에선 악귀 들린 소녀,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 이정은의 젊은 시절 역으로 주목받은 그다. ‘파이터’ 이후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선 북한주민 역을 맡았는데, 재밌는 건 당시 현장에서 ‘파이터’ 때 배운 북한억양을 썼다가 이상한 말투라고 지적받았단 사실이다. 북한도 지역마다 억양이 달라서다.

'사랑의 불시착' 북한 말투 왜 다르냐면 

윤 감독은 “저는 최대한 함경북도쪽 억양을 써왔다. 제가 만난 탈북민들이 대부분 그쪽 시골분들이고 평양에서 오신 탈북민도 만나봤지만, 한국사회 정착에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대부분 도시보다 시골에서 생활하신 분들”이라며 “자금적인 이유도 있고 문화적으로 살아온 배경이 달라 더 소외되는 분들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고 했다.

이번 영화에서 진아가 어릴 적 혼자 먼저 월남한 어머니(이승연, 사진)가 한국에서 낳은 또 다른 딸은, 윤재호 감독이 준비 중인 3부작의 마지막 '아버지의 비밀'에도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사진 인디스토리]

이번 영화에서 진아가 어릴 적 혼자 먼저 월남한 어머니(이승연, 사진)가 한국에서 낳은 또 다른 딸은, 윤재호 감독이 준비 중인 3부작의 마지막 '아버지의 비밀'에도 중요한 모티브로 등장한다. [사진 인디스토리]

부산에서 나고 자라 프랑스에서 14년간 영화 작업을 한 그는 파리 거주 시절 중국에 아들을 두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민박집 아주머니 사연으로 단편 ‘약속’을 만들며 탈북민들의 사연에 관심을 갖게 됐다. 지난해 그는 황해도 출신 방송인 송해의 삶을 조명한 다큐 ‘송해, 1927’도 ‘파이터’와 나란히 부산영화제에 선보였다. 이어 남북 이념갈등에 인육 사냥꾼이란 소재를 섞어낸 블랙코미디 단편 ‘사냥꾼’도 서울국제초단편영화제에서 공개했다. 차기작인 3부작의 마지막 ‘아버지의 비밀’은 프랑스 영화사와 제작을 논의하며 시나리오 작업 중이다. 가까운 미래를 배경으로 곧 다가올 세대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
“‘파이터’는 어쨌든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죠. 결국 남과 북이 먼 미래에 함께 있고 싶다면 지금부터 뭔가 함께하기 위한 일이 계속 있어야 해요. 보여주기식으론 다음 세대의 마음을 열 수 없죠. 끊임없이 만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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