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김호동의 실크로드에 길을 묻다

몽골제국이 기용한 통역관, 중국에만 2만6000명

중앙일보

입력 2021.03.21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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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인류는 언어장벽을 어떻게 넘었나

실크로드의 경유지 중 하나인 중국 신장(新疆) 투르판에서 발견된 마니교 경전의 단편이다. [사진 베를린 인도미술관]

실크로드의 경유지 중 하나인 중국 신장(新疆) 투르판에서 발견된 마니교 경전의 단편이다. [사진 베를린 인도미술관]

최근 화제가 된 한국형 SF영화 ‘승리호’를 보면서 흥미로운 장면에 눈길이 끌렸다. 등장인물들이 각자 다른 모국어로 말을 하는데도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그들이 모두 통역장치가 구비된 리시버를 귀에 끼고 대화하고 있었다. 지구가 병들고 우주에 쓰레기가 가득 찬 2092년이란 미래의 특정 시점을 설정한 영화이긴 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우리가 곧 겪게 될 현실이라는 점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황제 명령, 여러 언어로 즉각 번역
문화교류·종교전래 길잡이 역할
당나라 때 이미 한문 성경 선보여
AI시대의 바벨탑은 어떻게 될까

중국 한나라 무제는 북방의 강적 흉노와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서방의 월지라는 세력과 연맹하기 위해 장건(張騫)이라는 인물을 사신으로 파견했다. 2000년 전 옛날에도 언어의 장벽은 엄연히 존재했다. 불멸의 역사서 『사기』를 쓴 사마천은 장건의 여행을 서술하면서 ‘중구역(重九譯)’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거듭해서 아홉 번의 통역을 거쳐야 의사소통이 가능했다는 이야기다.

동서양 문화는 통역이란 징검다리를 거쳐 교류해왔다. 과거 외국에 사신단을 파견할 때 역관은 필요불가결한 존재였다. 조선에서 청나라에 보내는 연행사(燕行使)나 일본에 파견한 통신사(通信使)에도 통역은 반드시 들어갔다. 조정에서는 사역원(司譯院)이라는 관청을 두어 중국어·만주어·몽골어·일본어 등의 전문 역관을 양성했다. 이런 사정은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몽골제국과 같이 다민족을 통치하는 세계제국의 경우 역관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몽골어밖에 모르는 황제는 당연히 자기네 말로 명령을 내렸는데, 이를 ‘성지(聖旨)’라고 불렀다. 이 명령은 그 자리에서 몽골어로 필사됐고, 동시에 바로 한문·페르시아어·위구르어 번역본이 제작됐다.

라틴어로 쓴 러시아·청나라 조약문서

중국 시안 비림박물관에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의 머릿돌. 이무기 두 마리가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드에 길을 묻다. [중앙포토]

중국 시안 비림박물관에 있는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의 머릿돌. 이무기 두 마리가 여의주를 받들고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드에 길을 묻다. [중앙포토]

예컨대 현재 로마 바티칸 비밀 서고에는 몽골 황제가 1245년 교황에게 보낸 친서가 보관돼 있다. 당시에는 몽골어 원본 이외에 라틴어와 페르시아어 번역본도 함께 보냈는데, 그중에서 페르시아어로 된 것만 남은 것이다. 또 중국 각지에는 몽골 황제의 칙령을 새긴 비석이 다수 남아 있는데, 한쪽 면은 한문으로, 다른 한쪽은 몽골어로 된 것이 많다. 당시 중국을 통치하면서 기용한 관리들의 4.3%에 달하는 2만6000명이 통역 관련 인원이었다고 한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어마어마한 숫자다.

몽골의 ‘멍에’를 벗어던진 러시아는 맹렬하게 시베리아에 진출했다. 마침내 17세기 중반에 이르러 아시아의 동쪽 끝 아무르 강가에 이르게 된다. 중국에 ‘아라사(俄羅斯)’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됐고, 우리나라에서도 그렇게 불렀다. 물론 ‘러시아’라는 말을 옮긴 것이지만 정확하지 않다. 몽골인들이 ‘루스(Rus)’라는 말의 어두음 ‘r’을 발음하기 힘들어, 모음을 하나 더 첨가하여 ‘우루스’ 혹은 ‘오로스’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 한자로 옮겼기 때문이다.

비림박물관 입구. [중앙포토]

비림박물관 입구. [중앙포토]

러시아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와 국경 분쟁을 일으키게 됐고, 양측은 러시아 중부 네르친스크에서 담판을 벌였다. 그러나 통역에 나선 몽골인이 미묘한 외교적 용어를 제대로 소화해 내지 못해, 당시 베이징(北京)에 주재하던 유럽 출신 제주이트(예수회) 선교사들이 통역으로 기용됐다. 그들은 라틴어·만주어·중국어에 능통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1689년 조약이 체결됐는데, 역사적으로 유명한 이 네르친스크 조약의 정본(正本)이 라틴어로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회담 당사국의 언어인 만주어와 러시아어는 오히려 부본(副本)으로 남았다. 통역이란 난해한 작업이 빚어낸 희한한 일화다.

종교의 전파 역시 번역, 특히 경전 번역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일찍부터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선교를 시도한 조로아스터교와 마니교는 중앙아시아와 동아시아 주민을 개종시키기 위해 자기들의 경전을 소그드어·위구르어·한문 등으로 번역했다. 지금도 그 조각들이 남아 있어 선교에서 경전 번역이 얼마나 핵심 요소인가를 돌아보게 한다.

불교 역시 후한 말 이래 인도나 중앙아시아 출신 승려들에 의해 초보적인 번역이 이뤄졌다. 4~5세기 중앙아시아 출신의 승려 쿠마라지바(鳩摩羅什·344~413)는 상당수의 불경을 한문으로 옮겨 불교의 전파에 크게 기여했다. 당나라 때 현장(602?~664) 법사는 무려 17년간 인도에 머물면서 산스크리트어와 팔리어를 공부했다. 귀국할 때 갖고 온 수많은 불경을 정확한 한문으로 번역, 그 후 불교도들이 읽는 많은 경전의 텍스트를 마련해줬다.

반면 이슬람의 경전 꾸란은 극도의 신성성이 강조되며 번역이 금지됐다. 무슬림에 의한 번역이 처음 나온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따라서 경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랍어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됐는데, 이것이 오히려 이슬람권 내부의 광범위한 여행에 도움을 주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아프리카와 유라시아의 육로와 해로를 누비고 다닌 모로코 출신의 중세 여행가 이븐 바투타(1304~68)는 오로지 아랍어만으로도 별다른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을 정도였다.

로마기독교 전파 보여주는 중국 비석

불경을 한문으로 옮겨 중국에 전파한 인도 출신의 승려 쿠마라지바.

불경을 한문으로 옮겨 중국에 전파한 인도 출신의 승려 쿠마라지바.

기독교의 신·구약 성경은 이미 일찍부터 라틴어로 번역돼 유럽 각지로 퍼져나갔다. 동아시아로 기독교가 전파될 때에도 가장 먼저 이루어진 것이 성경 번역이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이미 당나라 때에 구약의 시편, 신약의 사복음서 등이 한문으로 번역됐다.

현재 중국 시안(西安)에 있는 비림(碑林)박물관에 가면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라는 큰 비석이 전시돼 있다. 로마(대진)의 기독교(경교)가 실크로드를 따라 어떻게 중국에 전파되어 유행하게 되었는가 하는 전말을 자세히 적은 기념비적인 자료다. 이것이 기독교의 동방 전파에서 첫 번째 파도였다.

모로코 출신의 중세 이슬람 여행가 이븐 바투타.

모로코 출신의 중세 이슬람 여행가 이븐 바투타.

그 후 16~17세기 제주이트 선교사들이 주도한 두 번째 파도가 밀려왔다. 특히 마테오 리치는 중국어 일상 회화는 물론 고전 한문에도 능통했다. 기독교 교리를 정리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비롯해 많은 한문 저서들을 남겼다.

19세기에 이르러 서구의 제국주의 세력을 등에 업은 세 번째 파도가 밀려왔다. 신·구약 성경이 한문으로 번역됐고, 그것이 조선에도 전해져 우리나라에 최초의 기독교 신자들이 생겨났다. 기독교는 이처럼 세 차례 파도를 타고 동아시아로 들어왔는데, 그때마다 통역과 번역을 통해서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은 것이다.

언어는 우리 사고(思考)가 머물고 자라는 집이지만 동시에 우리를 묶어 놓는 쇠사슬이기도 하다. 인간은 이 족쇄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했고, 그래서 성경 창세기에 나오듯이 이미 일찍부터 바벨의 탑을 쌓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신들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이렇게 해서 탑은 무너졌다. 역사상 인류 문명의 수많은 교류는 이러한 언어의 장벽을 넘으려는 부단한 노력의 결과로 이루어졌다. 이제 21세기 인류는 인공지능(AI)을 사용하여 새로운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바티칸 비밀서고에 보관 중인 몽골 황제의 친서
몽골 황제의 친서

몽골 황제의 친서

1207년부터 추진된 칭기즈칸의 정복 전쟁은 1227년 그의 사후에도 계속됐다. 칭기즈칸의 손자 바투가 이끄는 몽골군은 1230년대에 유럽을 침공해 러시아와 헝가리의 도시들을 차례로 무너뜨렸다. 몽골의 세력이 유라시아 대부분에 미치게 됐다. 유럽 기독교권에 커다란 위협이 됐다.

유럽은 공황 상황에 빠졌다. 이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는 1245년 프란체스코파 수도사인 요한 카르피니를 몽골의 궁정으로 파견했다. 그해 4월 프랑스 리옹을 출발한 카르피니는 러시아 키예프를 거쳐 이듬해 7월 몽골 카라코룸에 도착해 몽골 3대 황제 구육의 즉위식에 참가했다.

구육은 카르피니에게 교황에게 보내는 답신을 전했는데, 그 편지의 페르시아어 번역본(사진)이 현재 로마 바티칸 비밀 서고에 보관돼 있다.

김호동 서울대 명예교수

모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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