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빽판·길보드를 아십니까, 빌보드 키즈가 목숨 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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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8호 22면

나 땐 그랬지, ‘라떼’ 한 토막. 미국 혹은 일본에서 ‘원판’이라고 부른 오리지널 LP를 구한 이들은 다행이었다. 현지에서 연락책 혹은 운반책이 될 친지나 동료가 있었다. 혹은 만만치 않은 비용을 감당할 능력이 있었거나. 하지만 수많은 대한민국의 ‘빌보드 키즈’들은 1970~80년대에 눈물겹게 음원 획득에 나섰다. 빌보드 키즈 중 한 명인 평범한 회사원 배우진(52)씨의 분투기를 옮긴다. 빌보드 키즈 대부분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눈물 겨웠던 70~80년대 팝송 듣기 #라디오 곡 녹음 중 끊길라 노심초사 #전지 아끼려 볼펜 끼워 테이프 감아

영국 그룹 '폴리스' 리더인 스팅이 1985년 낸 솔로 데뷔 앨범의 '빽판(복제 LP).' 국내 금지곡이었던 '러시안스'가 실려있다. 김홍준 기자

영국 그룹 '폴리스' 리더인 스팅이 1985년 낸 솔로 데뷔 앨범의 '빽판(복제 LP).' 국내 금지곡이었던 '러시안스'가 실려있다. 김홍준 기자

“라디오 앞에 앉았다. DJ가 시카고의 ‘하드 투 세이 아임 쏘리’를 틀어준단다. 카세트플레이어의 REC 버튼을 눌렀다. 이런, DJ가 정규방송 관계로 끊어버렸다. 오늘 녹음도 실패. 김광한(1946~2015)·이종환(1937~2013) 등 좀 안다는 DJ라면 노래 전후로 3초 정도 공백을 줬을 텐데.

수만 원 나가는 원판은 언감생심. 이른바 '빽판(복제 LP)'을 사러 서울 황학동(청계천)에 갔다. 한장에 800원. 조금이라도 상태가 나은 걸 찾는다며 일일이 흰색·녹색 투톤의 재킷을 열어 봤다. 직원의 눈치가 뒤통수에 꽂혔다. 빽판에는 국내 금지곡이 그대로 실려 있었다.

지금은 대부분 멸(滅)한 동네 레코드 가게를 들락거렸다. 레코드의 뜻대로, 그곳에서는 정말 ‘녹음’을 해줬다. 사장님은 라이선스(마스터링 음원을 갖고 국내에서 재차 녹음해 제작한 음반) 테이프의 비닐 포장을 조심스레 뜯어 ‘더블데크(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가 두 개 장착된 기기)’에 돌려 녹음해줬다. 곡당 100원. 60분짜리 공(空)테이프에 보통 15곡이 들어가니 1500원에 공테이프 비용까지 3500원. 테이프 재질이 노멀이냐, 크롬이냐, 메탈이냐로 값은 차이 났지만…. 물론 사장님은 다시 조심스레 라이선스 테이프의 비닐을 신공처럼 붙였다. 그 테이프, 누군가 사 갔겠지.

1980년대에 나온 삼성 마이마이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혁신이었다. [중앙포토]

1980년대에 나온 삼성 마이마이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는 당시로서는 엄청난 혁신이었다. [중앙포토]

‘마이마이(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브랜드)’ 건전지 아낀답시고 테이프의 구동용 릴에 볼펜을 끼워서 ‘앞으로 감기(fast forward)’ ‘뒤로 감기(rewind)’도 했다.

서울의 종로, 명동 등 길거리 리어카에서 ‘최신 팝송’ ‘히트 가요’라는 이름으로 나온 ‘길보드’도 애용했다. 단돈 1000원이니, 길보드에 이름을 살짝 빌려준 빌보드 저리 가라는 반응이었다. '건전가요‘가 수록되지 않은 것도 장점이었다. 길보드는 아직도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그 명맥을 유지한다는데…. 빽판이나 녹음이나 길보드나, 저작권에 딱 걸리는데 그런 개념 자체가 희미했고 알아도 모른척 했고.

1970년대 말에 나온 최신팝송 카세트 테이프. 비지스의 '나이트 피버(Night Fever)'를 '밤의 열기'로 직역한 제목이 눈길을 끈다. 사진=구본정

1970년대 말에 나온 최신팝송 카세트 테이프. 비지스의 '나이트 피버(Night Fever)'를 '밤의 열기'로 직역한 제목이 눈길을 끈다. 사진=구본정

라이선스 LP를 사러 가다가 머리가 찢어지기도 했다. 영국 그룹 ‘다이어 스트레이츠’의 ‘브라더스 인 암스(86년 그래미 수상)’인데, 혹시나 누가 먼저 사갈까 봐 뛰어가다가 넘어졌지. 그만큼 라이선스도 많지 않았다는 말. 요새는 집에서 다운 받으면 되는데, 나처럼 머리 깨질 일 뭐 있겠나.”

그러면서 그는 머리카락이 많이 빠진다며 탈모의 진원지를 잘 살펴보라고 했다. 35년 전 생긴 상처는 LP의 ‘L’처럼 흉터를 남겼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영동고속도로의 한 휴게소에서 엽업 중인 '길보드' 판매 업소. 각종 트로트 메들리는 물론 , 1980 ~ 90년대에 발매된 희귀 카세트 테이프까지 진열돼 있다. [중앙포토]

영동고속도로의 한 휴게소에서 엽업 중인 '길보드' 판매 업소. 각종 트로트 메들리는 물론 , 1980 ~ 90년대에 발매된 희귀 카세트 테이프까지 진열돼 있다. [중앙포토]

건전가요, 금지곡은 뭐지?

◇ 건전가요
70년대 말과 80년대 국내 대중음악 음반 A면 끝 혹은 B면 끝에 수록됐다. ‘음반 삽입 의무제’에 따랐다. 정권 홍보적 성격을 띠었다. ‘아! 대한민국’ ‘정화의 노래’ ‘시장에 가면’ ‘어허야 둥기둥기’ 등 ‘밝고 고운 노래들’이었다. ‘진짜 사나이’ 같은 군가도 있었다. 90년대 들어 사라졌다. 들국화 1집의 ‘우리의 소원’도 건전가요인데, 들국화 자신이 불렀다. 초판에만 남아 있다.

◇ 금지곡
2018년 개봉한 영화 이름이기도 한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는 국내 금지곡이었다. 살인을 다루고 당시 공산권인 체코슬로바키아의 보헤미아가 제목에 나오기 때문이었다는 설이다. 스팅의 84년 작 ‘러시안스’도 금지곡이었다. 정작 내용은 소련 체제를 비판하는데, 냉전의 절정기에 소련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이유였다고 한다. 조지 마이클의 ‘아이 원트 유어 섹스’는 두말할 것도 없었다. 모두 해금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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