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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데이 칼럼] 비윤리적인 윤리주의자들의 업보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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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8호 35면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대기자/중앙콘텐트랩

내 이럴 줄 알았다. 나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고, 올 것은 오고야 마는 게 세상 이치다. 똥을 푸지게 싸 놨으니 똥파리가 끓는 건 피치 못할 바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사태 말이다.

LH사태 조국 때부터 예상된 일 #대통령부터 범죄자에 빚 느끼고 #우리편은 괜찮다는 메시지 보내 #지금이라도 다잡아야 최악 면해

조국 민정수석 당시의 온갖 잡음서부터 예상된 일이었다. 연이은 인사 검증 실패로 고위 공직 후보들이 줄줄이 자격 미달로 드러나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을 때부터, 대통령이 그 추한 민낯들의 임명을 강행했을 때부터 메시지는 분명했다. “우리는 그래도 된다.”

대통령 측근 비리 의혹에 내부 경종이 울리는데도, 경종을 울린 사람을 오히려 다른 책임 지워 내쫓아버렸을 때 메시지는 명확했다. “우리 편은 괜찮다.”

대통령의 30년 지기가 8전9기 당선된 선거에 청와대가 개입한 의혹이 꼬리를 무는데도, 해명 대신 궤변으로 일관했을 때 메시지는 확실했다. “우리가 옳다.”

결국 비판의 화살이 새로 임명된 조국 법무장관에 쏠리고 그 가족들로 번져 상상도 못 했던 비리들이 드러났을 때, 그러자 조국 쪽 사람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어 ‘성(聖)가족’을 두남두고 오히려 비판자들을 적폐요 개혁 저항 세력으로 몰아붙였을 때 메시지 역시 명쾌했다. “우리는 무조건 옳다.”

이후 조 장관이 사퇴하고 부인이 구속됐으며 조 장관 동생이 구속되고 조 장관 마저 기소됐음에도, 대통령이 국민 앞에 나와 “조 전 장관에게 마음의 빚을 졌다”고 말할 때 메시지는 오직 하나였다. “우리가 곧 정의다.”

그러니 박원순 전 서울시장의 성추행 피해자를 ‘성추행 호소인’이라고 부르자는 얘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여성 의원들이 맨정신으로 말이다. 다른 사람이야 눈앞 이익만 따져 그런 거라 쳐도, 여성단체 대표 출신인 남인순 의원은 그래선 안 되는 거였다. 그가 박 전 시장은 우리 편이니 잘못한 게 없고 피해자가 의심된다는 투로 말하는 건 자기 인생에 대한 부인이자 배신이었다.

선데이칼럼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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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할머니들을 팔아 사복을 챙긴 혐의로 기소된 윤미향 의원이 부끄럼 없이 국민대표 노릇을 계속할 수 있는 것도 다른 이유가 아니다. 여기에는 한일관계까지 끼어든다. (말로만이지만) 청산하기 좋아하는 이 정권은 역사적으로 (특히 보수정권 아래서) 친일파 청산이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은 게 몹시 불만이다.

따라서 일본에 각을 세우는 사람이나 단체는 쉽게 우리 편이 된다. 일·중·러 삼국 사이에서 한없이 무능했던 고종 마저 일제에 대항한 황제로 미화되는 마당이니, 위안부 문제 해결을 추구한다는 정의기억연대 같은 연대는 말할 것도 없다. 그 이사장을 지낸 윤 의원이 횡령과 사기 혐의 기소돼도 그냥 우리 편이고, 우리 편이니 그 잘못 앞에 쉽게 눈이 감긴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창피해서 이민이라도 가려 할 텐데, 조국 전 장관은 여전히 부끄러움을 모른다. 사사건건 말참견을 하며 나중에 또 어떻게 부메랑이 돼 날아올지 모르는 어록을 채워간다.

망자인 박 전 시장은 말이 없는데, 주변인들이 피해자를 향해 복수의 2, 3차 가해를 멈추지 않는다. 대놓고 피해자를 꽃뱀 취급하는 여검사까지 있으니 말 다했다. 숨죽이고 숨어있던 피해자가 직접 나와 살려달라고 ‘호소’해야 한다.

재판 결과와 상관없이 빚을 갚고 싶었던 대통령처럼, 정의연이 또 윤 전 이사장이 잘했건 못했건상관없다. 부정수령한 것으로 드러난 국가보조금도 환수할 생각이 없고, 검찰 기소 후에도 예정된 보조금은 꼬박꼬박 지급한다.

이렇게 행동해온 대통령과 정부가 어떻게 공직자들에게 도덕성과 정의를 요구할 수 있겠나. 역대 어떤 정권이라고 꼴뚜기들의 일탈이 없었겠나 마는, 이번 LH 경우처럼 전방위적이고 비도덕적인 예는 찾기 어렵다. 내부 정보를 이용한 부동산 투기가 범죄행위인 줄 인식하지 못하고 회사가 주는 ‘특혜’라 믿을 정도다. 그게 꼬우면 이직하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공직자를 이전엔 본 적이 없다.

어디 LH뿐이랴. 어떤 공공기관이건 (심지어 그들을 감시해야 할 선량들마저) 얼마나 크던 작던, 미리 알게 된 이권을 삼키려고 눈에 불을 켠 꼴뚜기들이 지금도 어물전을 흩트리고 있으리라. 윗물이 흐리니 아랫물도 탁할 수밖에 없고, 우리 편에만 서면 되니 죄의식조차 거추장스럽다.

청와대건 정부건 윤리적이지 못한 윤리주의자들로만채워져있으니 안 그럴 수 없다. 프랑스 철학자 앙드레 콩트스콩빌의 구분을 빌린 말이다. “윤리적이라는 건 내가 해야 할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이고, 윤리주의자가 되는 건 다른 사람이 해야 할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을 말한다.”(『자본주의는 윤리적인가』)

이런 결과가 해피엔딩일 수는 없을 터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지금이라도 바로잡으면 최악은 면할 텐데,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채근담』에 도움이 될 만한 교훈이 있다. 저들의 새드엔딩은 관심 없으나, 애먼 국민이 고황에 골병드니 하는 말이다.

“부귀와 명예가 도덕에서 온 것은 수풀 속의 꽃과 같아 절로 잎이 피고 뿌리가 뻗을 것이요, 공업(功業)에서 온 것은 화분 속 꽃과 같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흥폐가 있을 수 있으며, 권력에서 나온 것은 화병 속의 꽃과 같으니 시듦을 서서 기다릴 수밖에 없다.”

이훈범 중앙일보 칼럼니스트·대기자/중앙콘텐트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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