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로봇 속의 랍스터, 백남준을 오마주하다

중앙선데이

입력 2021.03.20 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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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8호 18면

하이퍼 팝아트 작가 필립 콜버트

‘랍스터 파운틴’(2020). [사진 아트앤크리에이티브]

‘랍스터 파운틴’(2020). [사진 아트앤크리에이티브]

요즘 세종문화회관 앞을 지나다니다 보면 중앙계단 위 ‘뜨락’에 설치된 3m짜리 거대한 빨간 랍스터가 대번에 눈길을 사로잡는다. 집게발 두 개를 번쩍 든 모습이 영락없이 영화 ‘록키’에서 계단 훈련을 마친 실베스터 스탤론을 떠올리게 한다. 영국의 팝아트 작가 필립 콜버트(Philip Colbert·42)의 설치 작품 ‘스탠딩 랍스터’다. 작가의 예술적 가상세계인 ‘랍스터 랜드’를 다스리는 이 랍스터는 작가의 분신이기도 하다.

세종문화회관서 5월 2일까지 전시
‘랍스터 랜드’ 영상·비디오 게임 등
설치·미디어 아트 80여 점 전시
작품 곳곳서 숨은 상징 찾기는 덤

백남준의 대작 ‘걸리버’ 옆자리
올해 만든 헌정 작품도 선보여

세종문화회관 세종미술관에서 시작된 ‘넥스트 아트: 팝 아트와 미디어 아트로의 예술여행’(3월 13일~5월 2일)은 팝아트 분야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급부상한 필립 콜버트의 환상적인 예술 세계를 회화와 설치, 미디어 아트 등 80여 점을 통해 즐겨볼 수 있는 자리다.

백남준의 ‘걸리버’(2001). [사진 아트앤크리에이티브]

백남준의 ‘걸리버’(2001). [사진 아트앤크리에이티브]

스코틀랜드 출신인 콜버트는 영국의 윌리엄 왕세손과 부인 케이트 미들턴이 나온 명문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독일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니체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 자신의 삶을 바꿨다고 말하는 콜버트는 “이 책 덕분에 생각하고,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개인의 자유가 갖는 힘을 이해하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개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이미지만으로 뜻이 통하는 세상이 됐다”

백남준을 오마주한 ‘TV 로봇 랍스터’(2021). [사진 아트앤크리에이티브]

백남준을 오마주한 ‘TV 로봇 랍스터’(2021). [사진 아트앤크리에이티브]

그가 처음부터 팝아트 작가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배우나 가수 같은 유명인을 위한 의상을 먼저 만들었고, 가구나 상품 기획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러다가 번쩍이는 은접시 위에 랍스터 같은 산해진미와 앙상한 해골을 올려놓고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강조한 17세기 네덜란드 ‘바니타스(Vanitas)’ 정물화가 가진 초현실적 분위기에 매료되면서, 삶이 바뀌었다.

초현실주의 작가인 살바도르 달리의 ‘랍스터 텔레폰’을 보고 난 2009년부터 랍스터를 자신의 초현실적인 자아로 삼았다. 이런 그를 눈여겨본 사람이 바로 찰스 사치 경이다. 데미언 허스트, 마크 퀸, 트레이시 에민 등을 발굴해 ‘yBA(young British Artists)’ 군단으로 키워낸 눈 밝은 갤러리스트다. 2019년까지 사치 갤러리 전속 작가로 있으면서 콜버트는 ‘헌트(hunt)’ 시리즈를 통해 기존의 팝아트를 넘어서는 ‘하이퍼 팝아트’ 작가로서 이름을 얻기 시작했다.

숨은 상징 이미지를 찾는 재미가 쏠쏠한 ‘다크 헌트 트립틱’(2018). [사진 아트앤크리에이티브]

숨은 상징 이미지를 찾는 재미가 쏠쏠한 ‘다크 헌트 트립틱’(2018). [사진 아트앤크리에이티브]

‘헌트’ 연작은 말 그대로 사냥이자 전쟁에 관한 작품이다. 그는 “지금은 문화예술을 이미지로 소비하는 싸움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으며, SNS를 통해 점점 더 깊이 교류하며 설명이 없어도 이미지만으로 뜻이 통하는 세상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1960년대 팝아트를 넘어서는 ‘하이퍼 팝아트’ 시대라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코로나19를 흉측한 문어에 비유하기도  

뒤샹의 작품 ‘샘’의 모형을 쓴 필립 콜버트. [사진 아트앤크리에이티브]

뒤샹의 작품 ‘샘’의 모형을 쓴 필립 콜버트. [사진 아트앤크리에이티브]

‘헌트’ 연작에는 피카소·앤디 워홀·프란시스 베이컨·조지 콘도·웨민쥔 등 저명 작가들의 초상화와 그들의 대표작이 파편처럼 등장하고, 아디다스와 나이키 같은 글로벌 브랜드와 영화 속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 문자 메시지에 쓰이는 이모티콘, 신기루 같은 비트코인이 곳곳에 배치돼 있어 관람객에게 숨은그림찾기 놀이에 빠지는 즐거움을 준다. 상징물의 활용은 랍스터가 입고 있는 잠옷의 문양에서도 찾을 수 있다. 주인공 랍스터는 보통 계란후라이들이 촘촘하게 그려진 옷을 입고 있는데, “왜 계란후라이냐” 라는 질문에 “하얀 원과 노란 원 두 개로 전 세계 누구나 똑같은 것을 떠올리게 하는데, 이만한 상징물이 또 어디에 있느냐”는 대답이 되돌아왔다고 허유정 큐레이터는 귀띔한다.

이번 전시에서 눈에 띄는 것은 백남준에 대한 오마주다.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한 장면을 그대로 옮긴듯한 백남준의 대작 ‘걸리버’(2001)와 ‘비디오 샹들리에 5’(1991)가 전시된 옆에는 백남준에 헌정하는 작품인 ‘TV 로봇 랍스터’가 걸려있다. 올해 만든 최신작이다.

이와 함께 코로나19를 흉측한 문어에 비유한 ‘사랑의 희망’을 비롯해 스테인리스스틸로 만든 치즈 강판 랍스터, 해바라기 무더기를 들고 있는 ‘빈센트 랍스터’, 미국 조슈아트리 국립공원의 사막을 보고 벤치마킹해 만든 ‘랍스터 랜드’ 영상 작품 및 비디오 게임도 볼거리다. 아, 참고로 작가는 랍스터는 물론 어떤 해산물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전시 기간 중 무휴. 성인 1만2000원.

정형모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h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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