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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현철의 시선

억울해도 참으라는 법원의 궁색한 소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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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최현철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요즘 법원엔 하나의 트렌드가 자리 잡았다. 판결문 말미에 재판부의 소회를 밝히는 것이다. 민감한 사건일수록 빠지지 않는다. 때론 깊은 통찰, 치열한 자기반성이 담겨 깊은 울림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재판 당사자의 억울함을 알지만 어쩔 수 없다'는 재판부 변명인 경우도 없지 않다.

민감 재판 뒤 소회 밝히는 법관들 #힘있는 사람 재판에선 '기교사법' #잘못된 판결 바로잡기는 외면

이른바 ‘혀 절단’ 사건은 정당방위에 대한 법리를 논할 때 언제나 등장하는 사례다. 강제 키스하려던 낯선 남자 혀를 깨물었다 되레 중상해범으로 몰려 처벌받은 사건. 그 사건의 피해자인 최말자(75)씨가 56년 만인 지난해 재심을 신청했다.

그 무렵 부산에서 판박이 사건이 발생했다. 술 취해 길에서 잠든 여성을 차에 태워 으슥한 곳으로 끌고 간 남성이 강제 키스를 하려다 혀가 잘렸다. 반세기 전 그 사건처럼 남성은 자신이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검·경의 태도는 그때와 달랐다. 경찰은 수사를 통해 남성의 성폭행 정황을 찾아냈다. 검찰은 적극적으로 법리를 해석해 정당방위를 인정했다. 무혐의 처분을 받은 여성을 보며 최 씨로선 자신의 억울함을 풀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해봄 직했다.

지난달 6일 오후 부산 연제구 부산지방법원에서 열린 성폭력 피해자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청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6일 오후 부산 연제구 부산지방법원에서 열린 성폭력 피해자 정당방위 인정을 위한 재심 청구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결과는 허망했다. 지난달 17일 부산지법 형사5부는 “재심은 안된다”고 결론 내렸다. 재판부는 결정문에 50여 년 전 재판 진행을 비교적 상세히 소개했다. 검찰은 가해자 혐의에서 강간미수를 뺐다. 그러니 처음부터 정당방위 주장이 설 자리를 잃었다. 재판부는 현장검증을 한다며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키스 당하는 장면을 재현하라고 요구했다. 전문의로부터 첫 키스의 반응이 어떤가에 대한 자문을 듣는가 하면, 순결성 검증까지 했다고 한다.

모두 직권남용에 해당할 수 있는 행위다. 그러나 재판부는 “최 씨측 주장은 당시 법원의 법 해석이 잘못됐다는 것이지, 새로운 증거는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법적으로 재심은 원재판에서 없었던 새 증거가 나왔을 때만 받아줄 수 있다. “지금의 잣대로 당시 재판 진행을 범죄로 단죄할 수 없다”고도 했다. 그러니 판결문 말미에 “최 씨 청구를 받아줄 수는 없지만 그의 용기와 외침이 헛되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란 소회를 밝힌들, 궁색함만 더할 뿐이다.

지난주 대법원이 형제복지원 사건에서 내린 판단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형제복지원은 군사독재 시절 자행된 대표적인 인권유린 사례다. 집 없이 떠도는 사람을 '부랑인'이라고 낙인찍어 시설에 수용했다. 그 안에선 온갖 폭력이 난무하고, 강제노역이 일상이었다. 죽는 사람도 부지기수여서 형제복지원에서만 12년간 513명이 숨졌다. 일부 수용자가 탈출해 실상을 알리자 경찰이 수사에 나서 박인근 원장을 구속했다. 그러나 검찰은 살인은 빼고 불법감금과 공금 횡령만으로 기소했다. 대법원은 불법감금마저도 무죄라고 판단해버렸다.

1987년 부산 형제복지원에 강제 수용된 어린이들의 모습. 중앙포토

1987년 부산 형제복지원에 강제 수용된 어린이들의 모습. 중앙포토

시간이 흘러 민주화가 이뤄지자 과거사 진상규명을 통해 당시 알려진 것보다 더했던 실상이 드러났다. 검찰도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비상상고라는 카드를 꺼냈다. 비상상고는 확정된 판결이 법령을 위반했다는 사실을 발견한 때 신청하는 비상 구제절차다. 최소한 그때 판단이 잘못됐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검찰의 반성문인 셈인데, 대법원은 이번에도 외면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판단의 근거는 같았다. 법령 또는 업무로 인한 행위는 처벌하지 않는다는 조항(형법 20조 정당행위)이다. 당시 법에 복지시설은 관의 보호위탁을 거절할 수 없다고 규정됐으니, 수용 과정에서의 인권 침해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다. 법에 위탁받은 사람의 인권을 짓밟아도 된다는 근거가 있는지 살피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대법원도 판결문 말미에 근엄한 한마디를 덧붙였다. “(이 사건은)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없는 인간 존엄성 침해며, 공적 담론을 거쳐 치유와 회복을 위한 공감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원은 피해자들을 외면했지만 사회는 이들을 보듬어줘야 한다니, 이율배반의 극치다.

부산지법이나 대법원이나 표현은 달라도 소회의 요지는 같다. 법적 안정성을 지키기 위한 고뇌 어린 판단이니 억울해도 참아달라는 것이다. 뇌물 받은 유재수 전 금융위 국장 사건에서 "부친이 재배한 감자·옥수수를 (돈 준 사람들에게) 돌렸으니 밀착이 아닌 친분관계"라는 논리로 형을 깎아준 게 법원ㅇ이다. 은수미 성남시장의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에선 "검찰이 항소장을 잘못 썼다"고 하급심 판결을 파기하기도 했다. 기교사법(技巧司法, 결과를 미리 정해놓고 논리와 증거를 짜맞추는 재판을 뜻하는 법조계 은어)이란 비난도 감수했던 법원이 이제와 '법적 안정성'을 호소한다. 그런 노력과 정성의 10%만 기울여도 잘못된 과거 판단을 뒤집을 논리는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최현철 정책 디렉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