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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혜수의 카운터어택

사인 좀 부탁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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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장혜수 기자 중앙일보 콘텐트제작에디터
장혜수 스포츠팀장

장혜수 스포츠팀장

정확히 누구였는지, 또 언제였는지는 가물가물하다. 대략 1980년대 중반이었고, 개그맨 또는 가수였을 거다. 그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너스레를 떨었다. 웃자고 지어낸 얘기였을 수도 있다.(그렇다면 성공한 셈이다. 정말 많이 웃었다) 요즘으로 치면 이른바 ‘자학개그’다. “하루는 한 사람이 제게 다가오더니 종이 7장을 내미는 거예요. 거기에 전부 제 사인을 해달라지 뭐에요. ‘야, 이제 나도 떴구나’ 생각하고 해줬죠. 그래도 궁금하잖아요. 물어봤어요. ‘왜 그렇게 많이 받으시냐’고. 그랬더니 이러지 뭐에요. ‘7장을 모아야 조용필 사인 1장이랑 바꾼다’고.”

삼성 김헌곤(왼쪽)이 건넨 공에 사인하는 추신수. [뉴스1]

삼성 김헌곤(왼쪽)이 건넨 공에 사인하는 추신수. [뉴스1]

2002년 한·일 월드컵 직후인 그해 7월, K리그 경기가 열린 프로축구장은 인산인해였다. 당시는 일본 J리거를 빼면 해외파가 별로 없었다. 4강 신화 주역 대부분이 K리그 소속구단으로 돌아가 경기에 출전했다. 하루는 부산 아이파크(당시는 아이콘스) 경기가 열린 부산 구덕운동장에 현장취재를 나갔다. 경기 전 라커룸 앞에서 당시 부산 사령탑이던 김호곤 감독(현 수원FC 단장)과 마주쳤다. 김 감독 손에는 백지 여러 장과 펜이 들려 있었다. “감독님, 그건 다 어디에 쓰시려고요.” 겸연쩍은 빛이 김 감독 표정에 스쳤다. “말하기가 좀 그렇긴 한데. 오늘 지인들이 경기장에 많이 왔어요. 다들 애들을 데리고 온 모양이라. 종국이 사인 좀 받아달라 해서. 기다립니다.” 종국이는 월드컵 당시 멀티 플레이어로 맹활약했던 송종국이다. 김 감독은 제자 사인을 받으려고 라커룸 앞에서 서성거렸던 거다.

프로야구 삼성 라이온즈와 SSG 랜더스의 연습경기가 열린 17일 대구 삼성라이온즈파크에서 찍힌 사진 한장이 화제다. 삼성 외야수 김헌곤이 야구공 2개와 사인펜을 들고 SSG 추신수를 향해 쭈뼛쭈뼛 다가갔다. 김헌곤은 쑥스러워하며 뭔가 말했고, 추신수는 웃으며 공에 차례로 사인했다. 추신수가 사인하는 걸 지켜보던 김헌곤이 좋아하는 모습이 사진기자 카메라에 포착된 것이다.

‘(영화)감독들의 감독’ 또는 ‘아티스트들의 아티스트’라는 말이 있다. 같은 직군 사람들이 인정하고, 닮고 싶어하는 대가를 가리킨다. 그런 점에서 보면 추신수는 ‘선수들의 선수’라고 할 만하다. 야구팬 관심도 추신수의 일거수일투족에 쏠린다. 보름 남은 프로야구 개막(4월 3일)과 신생팀 SSG의 등장, 그리고 추신수 활약에 대한 기대가 크다.

추신수를 보면 박지성(현 전북 현대 어드바이저)에 대한 아쉬움이 생긴다. 무릎 상태가 워낙 좋지 않아 뭐라 하기 그렇지만, 단 몇 경기라도 K리그 뛰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면 하는 아쉬움 말이다. 토트넘 홋스퍼 손흥민은 부디 추신수의 길을 걸어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때는 백지와 펜을 들고 라커룸 앞에서 서성거리는 홍명보 감독을 보게 될지도.

장혜수 스포츠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