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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엔 쪽박 올해는 대박, '한재미나리'도 영화따라 흥행 가도

중앙일보

입력

명품 미나리로 꼽히는 경북 청도의 '한재미나리'는 이맘때 2~4월이 제철이다. 갓 거둬들인 한재미나리를 들어보이는 미나리 농부 박진동(59)씨.

명품 미나리로 꼽히는 경북 청도의 '한재미나리'는 이맘때 2~4월이 제철이다. 갓 거둬들인 한재미나리를 들어보이는 미나리 농부 박진동(59)씨.

“미나리가 뭔지 모르지? 미국 바보들은.” “잡초처럼 아무 데서나 막 자라니 누구든 뽑아 먹을 수 있어.”

영화 ‘미나리’에서 할머니 순자(윤여정)가 하는 말에 뜨끔했다. 먹을 줄만 알았지. 미나리가 어디서 어떻게 자라는지는 미처 몰랐다. 미나리에도 이른바 급이 있다는 사실은 이번에 제대로 알게 됐다. ‘보성녹차’ ‘의성마늘’ ‘나주배’처럼, 미나리 중 유일하게 특허청으로부터 ‘지리적 표시 등록’을 취득한 것이 바로 경북 청도의 ‘한재미나리’다. 이곳 미나리가 남다른 맛을 낸다는 이야기다. 미나리를 뜯고 맛보려 청도로 갔다. 마침 한재미나리 수확이 한창이었다.

한재미나리는 일반 미나리에 비해 속이 단단해 쉽게 꺾이지 않는다. 식감도 아삭아삭하다.

한재미나리는 일반 미나리에 비해 속이 단단해 쉽게 꺾이지 않는다. 식감도 아삭아삭하다.

유령 마을의 희소식

경북 청도 한재미나리 단지. 한재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으로, 미나리 하우스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이곳에만 약 130곳의 미나리 농가가 있다.

경북 청도 한재미나리 단지. 한재는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지형으로, 미나리 하우스가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이곳에만 약 130곳의 미나리 농가가 있다.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란다. 물에서도 뿌리를 내리고, 음지에서도 싹을 틔운다. 영화 ‘미나리’가 낯선 미국 땅에서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한국인 가족을 왜 미나리에 비유했는지 알 법하다. 하나 질 좋은 미나리가 자라는 환경은 따로 있다.

‘한재’는 청도에서도 후미진 산골이다. 읍내에서 청도천을 따라 10㎞가량 내려오다 한재천이 흐르는 고갯길로 접어들면, 금세 육중한 산에 포위당하고 만다. 화악산(932m)·남산(851m)·철마산(633m)이 에워싼 분지에 농가가 옹기종기 모여 마을을 이룬다. 대략 130곳의 미나리 농가. 이 일대 초현리‧음지리‧평양리‧상리 땅에서 자란 것만 ‘한재미나리’란 브랜드를 붙일 수 있단다.

마을 언덕진 자리에서 굽어보면 미나리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가 산비탈을 따라 물안개처럼 퍼져 있다. “지형적 특성상 배수가 잘되고, 지하수도 풍부하다. 게다가 일교차까지 커 미나리가 속이 꽉 차게 여문다”고 청도농업센터 권병석 지도사는 설명했다. 물가에서 자란 미나리는 낮은 자세로 포복하길 좋아하지만, 한재미나리는 꼿꼿한 자세로 성장한다.

청도 한재미나리단지에 영화 '미나리'의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붙었다. 사진 한재미나리 영농조합법인

청도 한재미나리단지에 영화 '미나리'의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 수상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붙었다. 사진 한재미나리 영농조합법인

한재미나리는 지난해 봄 역대 최악의 불황을 맞았다. 지난해 2월 청도대남병원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터지고, 국내 첫 사망자가 발생하면서 매출에 큰 타격을 받았다. 농가 대부분이 제값을 받지 못하고 도매상에 미나리를 넘겼다. 올해는 성적이 나쁘지 않다. GS리테일에 따르면 작년 동기 대비 150%가량 매출이 증가했다. “작년엔 개미 한 마리 없는 유령 마을이었다. 코로나 확산 세가 줄고, 영화까지 흥행하면서 먹는 미나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 것 같다”고 한재미나리 영농조합법인 김무용 팀장은 말했다. 마을 한복판에 ‘전 세계를 감동시킨 미나리 원조는 청도’ ‘골든글로브 외국어영화상수상 축하합니다’ 등의 문구를 새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삼겹살보다 미나리

하우스에서 갓 뜯은 미나리를 흐르는 지하수에 담가 깨끗하게 씻어낸다. 미나리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살짝 쥐어 흙을 털어낸다.

하우스에서 갓 뜯은 미나리를 흐르는 지하수에 담가 깨끗하게 씻어낸다. 미나리에 상처가 나지 않도록 살짝 쥐어 흙을 털어낸다.

늦여름 밭에 뿌려둔 미나리는 겨울을 지나 2월~4월 수확한다. 4월이 지나면 미나리가 질겨지고, 향이 너무 강해져 상품성이 현저히 떨어진다. 미나리를 거두는 일은 100% 수작업이다. 어른 무릎 높이까지 자란 미나리를 낫으로 잘라낸 다음, 떡잎 따위 이물질을 일일이 떼어내고, 물로 씻어내는 게 순서다. 욕심은 금물이다. 미나리가 상처 입지 않도록 양손에 한 줌씩만 쥐고 흐르는 지하수에 슬슬 씻겨낸다. 모든 농가가 1㎏당 1만원을 받고 한재미나리를 판매한다.

“김치에도 넣어 먹고, 찌개에도 넣어 먹고, 아플 때 약도 되지. 원더풀, 원더풀이란다”

영화 ‘미나리’ 속 할머니의 대사처럼 미나리는 쓰임이 많은 식재료지만, 제맛을 즐기는 방법은 따로 있다. 한재미나리는 유독 삼겹살과 궁합이 잘 맞는다. 사실 한재에서 받은 첫인상은 마을 전체를 감도는 기름진 냄새였다.

미나리 수확 철이 되면 농가에서는 한편에 시식코너를 마련한다. 하우스에 모여 앉아 갓 뜯은 한재미나리에 구운 삼겹살을 올려 먹는다. 식당이 아니므로, 고기나 쌈장, 술은 손님이 각자 준비해야 한다. 불편함도 있지만, 어느 한 끼 식사보다 생동감이 크다. 고기를 구워 먹을 수 있는 하우스는 30곳 가까이 되는데,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대신 10년 전 7개에 불과하던 고깃집이 20곳으로 늘었다. ‘한재농사꾼박진동’처럼 농부가 직접 운영하는 고깃집으로 사람이 몰린다. 미나리 한 접시(700g, 1만원)가 삼겹살 1인분(130g, 8000원)보다 비싼 건 이곳에서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다. “고기 넉넉하게 달라는 사람은 없어도, 미나리 잘 챙겨 달라”고 조르는 손님은 부지기수란다.

한재미나리는 삼겹살과 궁합이 잘맞는다. 적당한 크기로 미나리를 접은 다음 삼겹살을 얹혀 싸먹는다. 불판에 삼겹살과 같이 올려 익혀 먹는 방법도 있다.

한재미나리는 삼겹살과 궁합이 잘맞는다. 적당한 크기로 미나리를 접은 다음 삼겹살을 얹혀 싸먹는다. 불판에 삼겹살과 같이 올려 익혀 먹는 방법도 있다.

한입 크기로 접은 미나리 위에 삼겹살 올려 입에 욱여넣었다. 향긋한 향을 머금은 삼겹살은 평소보다 개운한 맛을 냈다. 아삭한 식감 덕에 씹는 재미도 컸다. 봄 내음이 입안 가득 퍼졌다.

한재미나리에 삼겹살을 올려 먹는 일은 청도 사람에게 봄을 맞는 의식과도 같다. 한재미나리는 한 철 장사다. 여름이 오면 고깃집은 일제히 문을 닫는다. 삼겹살이 있어도, 한재미나리가 없으니 장사가 되지 않는다. 일 년에 딱 한철 봄에만 즐길 수 있는 성찬이었다.

청도=글‧사진 백종현 기자 baek.jo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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