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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양성희의 시시각각

‘미나리’ 그리고 윤여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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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재미동포 정이삭 감독의 ‘미나리’가 다음 달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감독상 등 6개 부문 후보에 올랐다. 1980년대 한인 가족의 미국 이민 정착기다. 스티븐 연과 윤여정은 각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한국 배우의 아카데미 연기상 후보 지명은 최초다. 특히 전통적이지 않은 귀엽고 유쾌한 ‘K-할머니’를 연기한 윤여정은 단연 유력 후보로 거론된다. 지금껏 ‘미나리’가 미국 안팎에서 받은 91개 상 중 33개가 여우조연상이다.

BTS·기생충 잇는 ‘미나리’ 돌풍 #한국 여배우의 존재감도 드러내 #세계 문화의 중심 ‘다양성’ 확인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미나리'의 윤여정            . [사진 판시네마]

한국 배우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미나리'의 윤여정 . [사진 판시네마]

이번 아카데미는 연기상 후보 20명 중 9명이 비백인으로 그 어느 때보다 ‘다양성’을 앞세웠다. 여성 후보도 70명으로 역대 최다다. 백인우월주의가 창궐했던 트럼프 시대에 대한 반감으로도 읽힌다. 할리우드에서는 2018년 아시아 갑부의 로맨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성공 이후 아시아·한국에 주목하는 콘텐트들이 꾸준히 나오고 있다. 정형화되지 않은 매력적인 아시안·한국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다. 다원주의·소수자성이라는 시대적 요청에 미국 내 아시아 커뮤니티의 약진이 맞물린 결과다.

'미나리'에서 윤여정은 전형적이지 않은 귀엽고 유쾌한 할머니 순자로 분해 최고의 신 스틸러란 평을 받았다. [사진 판시네마]

'미나리'에서 윤여정은 전형적이지 않은 귀엽고 유쾌한 할머니 순자로 분해 최고의 신 스틸러란 평을 받았다. [사진 판시네마]

다양성은 넷플릭스 같은 OTT(스트리밍 서비스)들이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가치이기도 하다. 이번 아카데미에서 넷플릭스는 최다 후보작·배우를 배출하는 저력을 발휘했다. ‘맹크’ ‘힐빌리의 노래’ ‘뉴스 오브 더 월드’ 등 16편의 오리지널 영화를 35개 부문 후보에 올렸다. 글로벌하지만 동시에 지역 시청자를 겨냥하니 다양성·지역성이 필수인 게 OTT들이다. 넷플릭스는 최근 엔터테인먼트 업계 최초로 ‘다양성 리포트’도 발간했다. 2018~2019년 미국에서 공개한 영화·드라마 180편을 분석한 결과 “유색 여성 감독, 흑인 배우 비율이 높아지는 등 다양성 지수가 개선되고 있다”고 밝혔다.

윤여정의 차기작은 역시 OTT인 애플TV플러스의 ‘파친코’다. 재미 한인 작가 이민진 원작으로 재일 한인 가족 3대의 이야기다. 윤여정·이민호·정은채 등이 출연한다. 이민진 작가는 최근 미국 MIT대에서 한 강연회에서 “2008년 첫 장편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은 ‘아시아인 주인공 작품은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며 영화화를 거절당했었는데, 큰 변화가 일고 있다”며 “그간 미디어에서 아시아인은 일상적·체계적·의도적으로 지워졌고, 그 결과 아시아인들은 스스로를 중요한 존재로 여길 수 없었다”고 말했다. 『백만장자…』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로 제작 중이다.

사실 국내 관객들에게 ‘미나리’는 다소 평이하고 심심한 범작처럼 느껴질 수 있다. 윤여정의 최고 연기가 ‘미나리’라는 데 동의하지 않는 이도 많다. 그러나 결혼·이혼 등으로 공백을 겪고, TV 연속극 속 이름 없는 엄마 역할을 하다가 56세에 영화 연기를 재개한 그녀가 74세에 아카데미 레드 카펫을 밟는 장면은 상상만으로도 벅차다. 1987년 베니스영화제 (강수연 ‘씨받이’),  2007년 칸영화제(전도연 ‘밀양’), 2017년 베를린영화제(김민희 ‘밤의 해변에서 혼자’)까지 세계 3대 영화제 첫 주연상을 여배우들이 차지해 온 역사도 있다.

윤여정이 노인 대상 성매매 여성으로 분한 영화 '죽여주는 여자'(2016).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판타지아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사진 CJ CGV]

윤여정이 노인 대상 성매매 여성으로 분한 영화 '죽여주는 여자'(2016).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판타지아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사진 CJ CGV]

일찍이 전통적 여성상과 거리가 먼 주체적 이미지를 구축해 온 윤여정은 젊은 감각, 깐깐하지만 꼰대 같지 않으며 위선·가식이 없는 진솔함으로 인기를 끌어 왔다. 영화에서는 강렬한 캐릭터를 주저 없이 연기하면서도 예능에선 어린 배우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고, 세련된 유머를 구사한다. 나이 먹을수록 전성기를 맞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처럼, 이름 없이 시들어 가는 무기력한 노년의 이미지를 깨는 배우다. 늙는다면 저렇게 늙고 싶다는 노년의 ‘워너비 스타’다.

극 중 윤여정은 물만 있으면 잘 자라고 버릴 데가 없는 “미나리 원더풀”을 외친다. 영화는, 윤여정이 심은 미나리가 무성하게 자란 것을 본 가족들이 “할머니가 옳았다”고 말하면서 끝난다. 한국 여성, 한국 할머니, 한국 여배우의 생명력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렇다. 한국 할머니 배우 윤여정, 원더풀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