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사설

김여정 담화에 반박조차 못한 정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16일 담화를 통해 “한ㆍ미 연합훈련은 붉은 선(레드라인)을 넘어서는 얼빠진 선택”이라며 한국과 미국을 맹비난했다. 사진은 김여정이 지난 1월 14일 노동당 8차 대회를 기념하는 열병식에서 박수를 치는 모습. [연합]

김여정 북한 노동당 부부장이 16일 담화를 통해 “한ㆍ미 연합훈련은 붉은 선(레드라인)을 넘어서는 얼빠진 선택”이라며 한국과 미국을 맹비난했다. 사진은 김여정이 지난 1월 14일 노동당 8차 대회를 기념하는 열병식에서 박수를 치는 모습. [연합]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한국과 미국을 맹비난하며 한·미 연합군사훈련의 전면 폐지를 요구하고 나섰다. “3년 전의 따뜻한 봄날은 다시 돌아오기 어려울 것”이라며 남북 군사합의 파기까지 언급했다.

“한·미 훈련 폐기” 공세 펼치는 북한 #정부가 침묵하면 더 큰 오판 부른다

차제에 정부와 국방 당국은 한·미 연합훈련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천명할 것을 촉구한다. 정부는 이달 초순 시작된 올해 연합훈련의 규모를 축소하고 실기동훈련 대신 컴퓨터 게임 수준의 지휘소 훈련으로 대체했다. 북한이 싫어하는 연합훈련만 조용히 잘 넘기면 대화 제의에 응해 올 수 있다는 기대도 숨기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연합훈련을 북한과 협의할 수 있다는 입장까지 밝혔다. 하지만 김여정은 “50명이 참가하든 100명이 참가하든, 그 형식이 이렇게 저렇게 변이되든 침략전쟁 연습이라는 본질과 성격은 달라지지 않는다”면서 정부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붉은 선(레드라인)을 넘어서는 얼빠진 선택”이라는 모욕적 표현까지 동원했다.

북한 노동신문에 실린 한미 연합훈련에 반발하는 김여정의 담화. [뉴스1]

북한 노동신문에 실린 한미 연합훈련에 반발하는 김여정의 담화. [뉴스1]

더 실망스러운 것은 담화에 대한 정부 당국의 반응이다. 방어 훈련이라고 반박하고 비판해야 마땅한 일인데도 통일부는 “연합훈련이 한반도 군사적 긴장을 조성하는 계기가 돼선 안 된다는 것이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라고 밝혔다. 마치 북한의 주장에 호응하는 듯한 모습이 아닌가. 오늘 방한하는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과 로이드 오스틴 국방장관이 뭐라 생각하겠는가. 정부는 명확한 언어로 북한의 억지 주장을 반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한·미 훈련이 침략전쟁 연습이라는 북한의 주장을 묵인하는 결과가 된다.

정부는 북한 비위 맞추기를 당장 그만둬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북한의 대남 비난과 억지 주장이 점점 더 수위를 높이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김여정의 비난에 때맞춰 대북전단법 제정이 이뤄진 게 그 사례다. 남한 당국을 압박하면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잘못된 신호를 북한에 주게 되고, 훨씬 더 심각한 오판을 부를 수 있다.

김여정은 “앞으로 4년간 발편잠을 자고 싶은 것이 소원이라면 시작부터 멋없이 잠 설칠 일거리를 만들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며 미국에 대한 경고도 빠뜨리지 않았다. 조만간 모습을 드러낼 바이든 행정부의 새로운 대북 정책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며, 여차하면 도발까지 서슴지 않을 것이란 위협이다. 이런 위협이 있다고 해서 바이든 행정부가 대북 정책의 큰 줄기를 바꿀 것이라 믿는다면 커다란 오판이다. 오늘부터 미 국무·국방 장관이 방한해 각각 외교·국방 장관 단독회담 및 ‘2+2’회의를 한다. 북한의 오판과 도발을 막고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도록 치밀한 전략을 짜고 일치된 목소리를 내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