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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이 약점된 文정권…2주만에 사과하면서도 "적폐 청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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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투기와 관련해 의혹이 폭로된지 2주만에 처음으로 사과했다. 문 대통령은 16일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민들께 큰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한 마음이다. 특히 성실하게 살아가는 국민들께 큰 허탈감과 실망을 드렸다”고 밝혔다.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뉴스1

문재인 대통령이 16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뉴스1

문 대통령은 “우리 사회의 부패 구조를 엄중히 인식하며 더욱 자세를 가다듬고 무거운 책임감으로 임하고자 한다”며 “공직자들의 부동산 부패를 막는 데서부터 시작해 사회 전체에 만연한 부동산 부패의 사슬을 반드시 끊어내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전날에 이어 재차 ‘적폐 청산’을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우리 사회 불공정의 가장 중요한 뿌리인 부동산 적폐를 청산한다면, 우리나라가 더욱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는 분기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정한 사회 만들고자 최선 다했다” 

민주노총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16일 청와대 앞에서 LH 농지 투기 규탄 기자회견 후 전수조사, 농지법 개정 등이 적힌 종이를 붙이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노총과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16일 청와대 앞에서 LH 농지 투기 규탄 기자회견 후 전수조사, 농지법 개정 등이 적힌 종이를 붙이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문 대통령은 다만 “촛불혁명으로 탄생한 우리 정부는 부정부패와 불공정을 혁파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고자 최선을 다했다”며 “부패인식지수가 매년 개선돼 역대 최고순위를 기록하는 등 더 공정하고 깨끗한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부동산 적폐 청산을 국정의 중심에 두겠다는 문 대통령의 발언에 이어 여야가 특검과 국회의원 전수조사 등에 합의하면서 한국 사회 전체가 당분간 ‘부동산 투기 이슈’에 빨려들어갈 가능성도 거론된다. 부동산 이슈가 단순히 이번 4·7 재보선을 넘어 내년 대선의 판도까지 좌우할 결정적 변수로 등장할 수 있다는 뜻이다. 실제로 특검이나 정부합동특별수사본부의 수사가 전방위적으로 확대될 경우 그 영향이 어디로 튈지, 어느 진영에 유리할지 짐작하기 어렵다는 분석도 나온다.

한편 이날 문 대통령의 사과에 대해 배준영 국민의힘 대변인은 “야당의 요구나, 국민 3분의 2 여론에 등 떠밀리기 전에 사과하셨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며 “LH 사태를 단순히 부동산 적폐로 치부하며, 책임을 비켜나가시려는 모습은 여전히 실망스럽다”고 비판했다.

심상정 정의당 의원도 “대통령의 짤막한 부동산 정책 반성문을 보며 당혹스러웠던 사람은 저만이 아닐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그는 “부동산 적폐는 예전 정부부터 누적된 것이지만 이번 공직자들의 부패는 문재인 정부의 적폐”라며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다.

“과정은 공정할 것”이 오히려 약점으로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10일 국회 본관 로텐더홀에서 취임사를 하고있다. 문 대통령은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했다. 중앙일보 오종택 기자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5월 10일 국회 본관 로텐더홀에서 취임사를 하고있다. 문 대통령은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라고 했다. 중앙일보 오종택 기자

이날 야당에선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란 취임사로 임기를 시작한 문 대통령이 또다시 불공정 이슈로 사과했다”는 말이 나왔다. 실제로 문재인 정부는 ‘공정 사회’를 금과옥조처럼 내세웠지만, 매번 정부의 발목을 잡은 건 역설적이게도 ‘불공정 사회’였다.

시작은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 논란이었다. 정부는 올림픽을 앞두고 급하게 남북 단일팀 구성을 추진했다. 그러자 2030 세대를 중심으로 남측 선수들이 출전 기회를 잃을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되며, 불공정 이슈로까지 번졌다.

청와대 국민청원에는 “선수들의 노력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선심 쓰듯 국가 차원의 의의를 부여하는 발상이 역겹다”는 글까지 올라왔다. 정치적 목적을 위해 개인이 희생되는 모습이 청년층의 예민한 ‘공정 감수성’을 건드린 것이다. 결국 문 대통령은 “선수들의 입장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다”며 유감의 뜻을 밝혔다.

인천국제공항공사노동조합 조합원들이 12일 정부세종청사 국토교통부 앞에서 인천공항 비정규직 근로자의 일방적 정규직 전환 중단을 촉구하는 집회를 갖고 있다. 뉴스1

인천국제공항공사노동조합 조합원들이 12일 정부세종청사 국토교통부 앞에서 인천공항 비정규직 근로자의 일방적 정규직 전환 중단을 촉구하는 집회를 갖고 있다. 뉴스1

불공정 논란이 불거질 때마다 비판의 목소리를 크게 낸 이들은 대체로 청년층이었다. 인천국제공항공사 보안검색요원의 정규직 전환 문제가 대표적이다. 인천공항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은 문 대통령의 1호 현장 공약이었다. 하지만 청년층은 채용의 절차적 불공정성을 비판했다. 정부는 “정규직 채용이 줄어드는 게 아니다”라고 해명했지만, 청년층은 애초에 채용 규모가 아닌 절차적인 공정성을 문제삼았기 때문에 달래지지 않았다. 서울교통공사 친인척 특혜채용, 기간제 교사 정규직화 등은 청년 취업난과 맞물려 불공정 이슈로 확대됐다.

박성민 청년컨설팅그룹 ‘민’ 대표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최근 SK하이닉스 등의 성과급 논란은 공정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세대의 등장을 보여준다”며 “현 정부가 ‘공정’을 정권의 레토릭(수사)으로 내세웠지만 새로운 공정의 개념과 맞지 않으면서 충돌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결국 지난해 9월 ‘청년의 날’에 “정부는 ‘공정’에 대한 청년들의 높은 요구를 절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자산불평등 만나며 폭발한 ‘불공정’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강당에서 열린 '문재인 정부 4년, 서울 아파트 시세변동 분석결과 기자회견'에서 김성달 경실련 부동산건설개혁본부 국장(왼쪽부터), 윤순철 경실련 사무총장, 김헌동 경실련 부동산건설개혁본부 본부장, 정택수 경실련 부동산건설개혁본부 팀장이 피켓을 들고 있다. 뉴스1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 강당에서 열린 '문재인 정부 4년, 서울 아파트 시세변동 분석결과 기자회견'에서 김성달 경실련 부동산건설개혁본부 국장(왼쪽부터), 윤순철 경실련 사무총장, 김헌동 경실련 부동산건설개혁본부 본부장, 정택수 경실련 부동산건설개혁본부 팀장이 피켓을 들고 있다. 뉴스1

젊은 세대가 공정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왜일까. 정지우 문화평론가는 『인스타그램에는 절망이 없다』에서 “그들이 의지할 것이 공정성밖에 없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세대 간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되는 상황에서 “소박한 삶에 이르기 위한 마지막 길”이 공정성이라고 믿기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실제 현 정부에서 논란이 된 불공정 이슈는 경제적 불평등, 특히 자산 불평등과 얽혀 있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2018년 초 정부의 암호화폐 규제도 공정성 이슈로 번졌는데, 그 배경에도 자산 불평등이 있었다. 당시 청와대 국민청원에 ‘암호화폐 규제 반대’ 게시글이 올라왔는데, “부동산과 주식으로 이미 돈을 번 기성세대가 (정작 젊은 세대에는) 넘을 수 없는 벽을 만들고 있다”는 댓글도 있었다.

현 정부에서 폭등한 부동산 가격은 특히 자산 불평등을 심화하며 한국 사회 불공정 이슈의 뇌관이 됐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부가 무리하게 시장에 개입해 부동산 가격을 상승시키면서 무주택자는 집을 갖기 힘들어졌고, 부자는 더 부자가 됐다. 대출 규제 등은 오히려 무주택자의 시장 진입을 막는 효과를 냈다. 그런 측면이 시장의 불공정성을 더 키웠다”고 말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지난해 12월 26일 오전 서울 송파구 동부지방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는 모습. 뉴스1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지난해 12월 26일 오전 서울 송파구 동부지방법원에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위해 출석하고 있는 모습. 뉴스1

또 이철승 서강대 교수는 “기득권층이 품앗이 네트워크를 통해 자신들의 자식들에게 특혜를 주어 취직시키는 일이 비일비재하자… 공정성이 담보되지 않은 경쟁의 실상에 대해 (청년층이) 더 심각하게 반응하는 것”(『불평등의 세대』)이라고 했다. 그 정점이 ‘조국 사태’였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의 입시 비리 의혹은 국론 분열로까지 커졌다. 조 전 장관의 부인 정경심 교수의 자녀 입시 비리 혐의에 대해 1심 재판부는 지난해 12월 모두 유죄를 선고하며, “(정 교수 딸이) 실질적 혜택을 입어 다른 응시자들이 불합격하는 불공정한 결과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조국 사태’ 이후 문재인 정부가 약속했던 ‘공정’은 현실의 ‘불공정’과 괴리하며 ‘내로남불’은 현 정부의 최대 유행어가 됐다.

윤성민 기자 yoon.sung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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