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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미가 변했다…여성 아티스트 본상 휩쓸고 흑인운동 품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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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린 제63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더 비거 픽처' 무대를 선보인 릴 베이비. 흑인이 백인 경찰에게 폭력적으로 제압 당하는 장면을 재연했다. [AP=연합뉴스]

14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열린 제63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더 비거 픽처' 무대를 선보인 릴 베이비. 흑인이 백인 경찰에게 폭력적으로 제압 당하는 장면을 재연했다. [AP=연합뉴스]

보수적인 그래미가 달라졌다. 14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컨벤션센터와 야외무대를 중심으로 열린 제63회 그래미 시상식에서 4대 본상(제너럴 필드) 트로피는 모두 여성 아티스트에게 돌아갔다. 특히 ‘흑인 목숨도 소중하다(BLM)’는 흑인 인권 운동을 다룬 노래들이 대거 수상하면서 놀라움을 안겼다. 아쉽게도 아시아 가수 최초로 ‘베스트 팝 그룹/듀오 퍼포먼스’ 부문 후보에 오른 방탄소년단(BTS)은 수상에 실패했지만, 백인ㆍ남성 중심의 시상식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변화의 물꼬를 싹틔운 셈이다.

빌리 아일리시 2년 연속 ‘올해의 레코드’ #비욘세 28번째 트로피로 솔로 최다 기록 #한국 가수 최초로 단독 무대 꾸민 BTS #“올해 더 열심히 달려…내년도 도전할 것”

여성 아티스트의 연대도 돋보였다. 2019년 11월 발표한 싱글 ‘에브리싱 아이 원티드(everything I wanted)’로 2년 연속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한 빌리 아일리시는 메건 더 스탤리언을 향해 “올해는 당신이 이 상을 받아야 했다. 누구도 이길 수 없는 한 해를 보냈다”며 수상의 기쁨을 나눴다. 지난해 첫 정규 앨범과 타이틀곡 ‘배드 가이’로 신인상은 물론 올해의 레코드ㆍ앨범ㆍ노래 등 4대 본상을 석권한 빌리 아일리시는 ‘Z세대의 아이콘’답게 솔직한 면모를 보였다. ‘올해의 앨범’은 테일러 스위프트의 ‘포크 로어(folklore)’가 차지했다. 2010년 ‘피어리스’, 2016년 ‘1989’에 이어 세 번째 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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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우리가 싸운 에너지 유지하길”

2년 연속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한 빌리 아일리시와 오빠 피니어스 오코넬. [AP=연합뉴스]

2년 연속 '올해의 레코드'를 수상한 빌리 아일리시와 오빠 피니어스 오코넬. [AP=연합뉴스]

비욘세(왼쪽)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새비지'로 신인상을 받은 메건 더 스탤리언. [AP=연합뉴스]

비욘세(왼쪽)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새비지'로 신인상을 받은 메건 더 스탤리언. [AP=연합뉴스]

신인상을 비롯해 3관왕에 오른 메건 더 스탤리언은 ‘새비지(Savage)’ 피처링에 참여한 비욘세에게 공을 돌렸다. 스탤리언은 “데스티니 차일드 공연을 보면서 비욘세처럼 되고 싶다고 마음먹었는데 목표를 이루게 됐다”며 감사를 전했다. 함께 무대에 오른 비욘세는 “함께 하게 돼 영광”이라고 화답했다. 지난해 미국 노예 해방의 날(6월 19일)을 기념해 싱글 ‘블랙 퍼레이드(BLACK PARADE)’를 발표한 비욘세는 그래미 역사를 새로 썼다. 27, 28번째 트로피를 거머쥐면서 솔로 가수 최다 수상 기록을 세웠다. 그는 “가수로서 우리 역할은 시대를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한다”며 “모든 흑인 아티스트를 격려하고 싶다”고 말했다.

‘올해의 노래’는 허(H.E.R)의 ‘아이 캔트 브리드(I Can’t Breathe)’에 돌아갔다. 지난해 백인 경찰에게 목숨을 잃은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마지막으로 했던 말이자 BLM의 슬로건이기도 하다. 허는 “저의 두려움이 이렇게 큰 변화와 영향을 가져올 줄 몰랐다. 이것이 내가 음악을 하는 이유이자 우리가 보고 싶어하는 변화”라며 “2020년 여름 동안 우리가 싸웠던 에너지를 유지하자”고 강조했다. 릴 베이비는 ‘더 비거 픽처(The Bigger Picture)’ 무대에서 흑인이 백인 경찰에게 폭력적으로 제압당하는 장면을 재연하기도 했다. 한국계 뮤지션 앤더슨 팩 역시 지난해 미국이 처한 현실에 대한 저항적 메시지를 담은 ‘록다운(Lockdown)’으로 ‘베스트 멜로딕 랩 퍼포먼스’에 선정됐다.

“BTS, 올해 처음 후보 올라 역사 쓴 그룹”

'아이 캔트 브리드'로 '올해의 노래'에 선정된 허. 오른쪽은 티아라 토마스. [AFP=연합뉴스]

'아이 캔트 브리드'로 '올해의 노래'에 선정된 허. 오른쪽은 티아라 토마스. [AFP=연합뉴스]

'포크로어'로 '올해의 앨범'을 수상한 테일러 스위프트. [로이터=연합뉴스]

'포크로어'로 '올해의 앨범'을 수상한 테일러 스위프트. [로이터=연합뉴스]

올해 시상식은 코로나19로 여느 해와는 다른 모습으로 진행됐다. 시상은 컨벤션센터 야외무대에서 진행됐고 축하 공연은 실내 공연장을 비롯해 LA 곳곳에서 펼쳐졌다. 코로나 장기화로 문을 닫은 인디 공연장 종사자들이 시상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무관중으로 열린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앞뒤 순서를 맡은 아티스트들이 함께 무대 위에 둘러앉아 손뼉을 치며 호응하기도 했다. 드레스 등 의상과 맞춘 마스크 패션도 눈길을 끌었다. 총 83개 부문 중 9개 부문만 본 시상식에서 시상하고 나머지는 사전 시상식 격인 ‘프리미어 세리머니’에서 발표했다. 한국계 미국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은 ‘베스트 클래식 기악 독주’ 부문에서 수상했다.

한국 가수 최초로 그래미 시상식 단독 공연을 펼친 방탄소년단은 24팀 중 23번째로 등장했다. 서울 여의도 일대에서 사전 촬영한 ‘다이너마이트(Dynamite)’ 공연 영상으로 무대를 꾸몄다. 그래미의 상징인 그라모폰(최초의 디스크 축음기) 앞에서 시작해 포토월, 야외 옥상에 마련된 헬리패드로 이동하는 무대 연출은 역동감을 더했다. 한강을 배경으로 펼쳐진 서울의 야경은 LA 야외무대와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진행자 트레버 노아는 “올해 처음으로 후보에 오르면서 역사를 쓴 한국 그룹”이라고 소개하며 “이곳에 직접 올 수 없으니 한국에서 멋진 세트를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상을 줘야 할 것 같다”며 극찬했다. 스페인어 앨범 최초로 빌보드 앨범 차트 2위에 오른 푸에르토리코 출신 래퍼 배드 버니의 ‘다키티(Dakiti)’ 등 라틴팝 무대도 눈에 띄었다.

그래미 여전히 시대 변화 뒤처져 비판도

한국 가수 최초로 그래미에서 단독 공연을 선보인 방탄소년단. [AP=연합뉴스]

한국 가수 최초로 그래미에서 단독 공연을 선보인 방탄소년단. [AP=연합뉴스]

서울 야경을 배경으로 '다이너마이트' 무대를 꾸민 방탄소년단. [사진 빅히트엔터테인먼트]

서울 야경을 배경으로 '다이너마이트' 무대를 꾸민 방탄소년단. [사진 빅히트엔터테인먼트]

1957년 설립된 미국 레코딩 예술과학 아카데미 회원 투표로 선정되는 그래미는 2019년 처음으로 회원 시스템을 손질해 여성ㆍ유색인종ㆍ39세 이하 회원 비율을 대폭 확대했지만 여전히 변화에 뒤처져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방탄소년단의 ‘다이너마이트’는 한국 가수 최초로 빌보드 싱글 차트 1위에 오른 데 이어 28주 연속 50위 안에 머무르는 등 장기 흥행하며 ‘베스트 팝 듀오/그룹 퍼포먼스’ 부문 수상이 유력했으나 해당 부문 트로피는 레이디 가가와 아리아나 그란데의 ‘레인 온 미(Rain On Me)’에 돌아갔다. 지난해 2월 발매한 정규 4집 ‘맵 오브 더 솔: 7’으로 국제음반산업협회(IFPI)가 선정한 글로벌 올 포맷ㆍ글로벌 앨범 세일즈ㆍ글로벌 아티스트 등 3개 부문에서 1위에 오르는 등 다른 부문 수상도 충분히 노려볼만한 상황이었다.

2019년 ‘베스트 R&B 앨범’ 부문 시상자로 첫발을 디딘 후 지난해 퍼포머로 참석해 릴 나스 엑스의 ‘올드 타운 로드’ 합동 무대를 꾸민 방탄소년단 역시 그래미 단독 무대와 수상에 대한 염원을 여러 차례 밝혀왔다. 빌보드 뮤직 어워드는 2017년부터 4년 연속,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는 2018년부터 3년 연속 수상한 이들에게 그래미는 가장 높은 장벽이었다. 방탄소년단은 이날 소속사를 통해 “쟁쟁한 뮤지션들과 함께 후보에 오른 데 이어 염원하던 단독 공연까지 펼쳐 매우 영광스럽다. 의미 있는 순간으로 기억될 것”이라며 “모두 아미 여러분 덕분이다. 다음 목표를 향해 쉼 없이 나아갈 것”이라고 밝혔다.

멤버들은 시상식이 끝나고 네이버 브이라이브를 통해 후일담을 전하기도 했다. RM은 “돌아가 보면 우리가 상보다 퍼포먼스를 더 원했다”고 밝혔다. 진은 “남준이(RM)가 무대를 찍으면서 이 무대는 평생 남는 거라고, 증손주들도 보고 나중에 아들한테까지 자랑한다고 했다”며 “이런 역사적인 무대에 함께해줘서 고맙다”고 덧붙였다. 뷔는 “더 좋은 음악과 무대를 멋있게 만들어서 내년에 한 번 더 그래미를 올 수 있게 해보겠다”고 다짐했고, 슈가는 “올해 더 열심히 달립시다”라며 의지를 불태웠다. 트위터에는 ‘BTSOurGreatestPrize(방탄소년단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상)’이라는 해시태그(#)를 단 게시물이 140만 건가량 올라오면서 실시간 트렌드를 장악했다.

한편 캐나다 출신 흑인 팝스타 위켄드는 지난 11일 “앞으로 비밀위원회 그래미에 내 음악을 제출하지 않겠다”며 보이콧을 선언했다. 지난해 발표한 정규 4집 ‘애프터 아워즈’와 수록곡 ‘블라인딩 라이츠’로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으나 후보에 오르지 못한 데 따른 것으로, 위켄드는 “그래미는 여전히 부패하다”고 비판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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