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공공기관 개혁" 그렇게 출발…12년만에 해체론 나온 LH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기존의 병폐를 도려내고 해체 수준의 환골탈태하는 혁신 방안을 마련하겠다.”(11일 정세균 국무총리)

“주택 공급 등 본연의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공공기관으로 거듭나도록 강력한 혁신 방안을 조속히 마련하겠다.”(12일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LH 전북본부. 프리랜서 장정필

LH 전북본부. 프리랜서 장정필

직원들의 신도시 땅 투기로 논란을 불러일으킨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구조조정 칼날 위에 섰다. LH 사태에 대한 국민적 공분을 진정시키려 총리가 나서 “해체”를 운운할 정도다. 물론 시장의 기대는 크지 않다. 논란의 중심에 선 LH마저 과거 정부가 주도한 공공기관 개혁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LH의 전신은 대한주택공사(주공)와 한국토지공사(토공)다.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 극복이 제1과제였던 김대중 정부는 출범 초기인 1998년 8월 기획예산처(현 기재부) 주도로 ‘공기업 민영화 및 경영 혁신 계획’을 수립한다. 주택 건설(주공)과 택지 개발(토공)로 나뉜 두 기관을 합쳐 경영 효율성을 높이자는 취지였다. 이후 통폐합 주도권, 인원 감축을 둘러싼 주공ㆍ토공 간 치열한 ‘밥그릇 싸움’이 일었다. 논란은 정치권으로까지 번졌다. 결국 3년에 걸친 공방 끝에 두 기관 통합은 백지화했다.

주공ㆍ토공 통합론이 다시 수면 위로 오른 건 이명박 정부 들어서다. 중복 기능 해소, 효율성 강화를 기치로 내걸었다. 2009년 10월 1일 두 기관을 합친 LH가 출범한다. 11년에 걸친 진통 끝에 통합 LH가 탄생할 수 있었다.

12년이 지난 현재 LH의 모습은 드러난 그대로다. 직원들의 신도시 땅 투기 논란으로 통합 LH는 출범 이후 최대 위기를 맞았다. 공공 부문 주택ㆍ토지 개발 업무를 사실상 독점하면서 조직은 비대해졌고, 직원들이 실명으로 신도시 땅 투기에 나설 만큼 내부 통제는 무용지물이 됐다.

양준모 연세대 경제학과 교수는 “정부와 LH 등 공공 부문이 대규모 택지 개발과 주택 공급을 사실상 독점하면서 소수 공직자가 펜대 하나만 굴리면 수조원 땅값이 오르는 구조가 됐다”며 “내부 통제나 처벌 규정이 미비한 상황이라 사실상 LH 직원들의 땅 투기 등 비리를 정부가 방치한 격”이라고 말했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신도시 투기 1차 전수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뉴스1

정세균 국무총리가 지난 11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대로 정부서울청사에서 신도시 투기 1차 전수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뉴스1

전문가들은 정부 주도로 공공기관 개혁을 반복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섣불리 LH 해체를 추진했다가는 주택ㆍ토지 개발 관련 공공 조직의 비대화, 비효율성 문제를 더 키울 수도 있어서다. 발등의 불인 2ㆍ4 공급 대책에 차질이 생길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정부가 해야 할 정책을 공공기관에 전가하며 지출과 부채를 함께 떠넘기는 구조, 정부와 정치권이 ‘낙하산’ 인사를 떨어뜨리며 공공기관 운영을 좌지우지하는 현실이 더 문제란 분석이다.

조준모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는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조지 스티글러가 시장 실패보다 더 무서운 게 정부(정치) 실패라고 했다”며 “시장 기능을 존중하며 투명한 정책을 해야 하는데 공공이란 미명 하에 더 큰 부패, 더 심한 비효율을 방치했다”고 비판했다.

조직을 합치고 안 합치고의 문제가 아니라 정부의 공공기관 정책 수립과 운영의 실패란 지적이다.

김대중 정부의 공공기관 민영화, 노무현 정부의 공공기관 지방 이전, 이명박 정부의 공공기관 선진화, 박근혜 정부의 공공기관 구조 개혁 등. 매 정권 다른 문패를 달고 공공기관 혁신을 추진했지만 대부분 무위로 돌아갔다.

김대중 정부 시절 공공기관 민영화와 전력산업 구조 개편 목적으로 한국전력공사 분리와 민영화를 추진했다. 하지만 한전과 한국수력원자력, 5개 발전 자회사(남동ㆍ남부ㆍ동서ㆍ중부ㆍ서부발전), 한전산업개발 등 여러 회사로 쪼개졌을 뿐 이후 절차는 답보 상태다. 원래 민영화 목표는 이루지 못한 채 전력 공공 조직만 중복ㆍ비대화하는 결과를 불렀다.

노무현 정부 때는 공공기관 이전이 주된 과제였다. 역시 행정수도 이전, 혁신도시 건설 등 이후 절차가 막히면서 반쪽 이전에 그쳤다. 기반 시설이 충분히 마련되지 않은 상황에서 공공기관만 전국 곳곳에 퍼지면서 오히려 비효율을 키웠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지난 4일 오후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이 사들인 경기도 시흥시 과림동 주변 도로에 LH를 비난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뉴스1

지난 4일 오후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이 사들인 경기도 시흥시 과림동 주변 도로에 LH를 비난하는 내용의 현수막이 걸려 있다. 뉴스1

이명박 정부 때 추진한 공공기관 선진화도 마찬가지다. 대표적 사례가 주공ㆍ토공 통합이다. 누적된 부채와 비효율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두 기관을 합쳤지만 결국 조직 비대, 내부 통제 시스템 붕괴로 이어지며 LH 땅 투기 논란의 불씨가 됐다.

박근혜 정부 때 추진한 공공기관 구조개혁도 같은 과정을 밟았다. 이명박 정부 시절 자원 외교에 무리하게 동원됐다 위기에 몰린 석유ㆍ가스ㆍ광물 등 에너지 공기업이 당시 도마에 올랐다. 통폐합 등이 논의됐지만 역시 제대로 결론은 내지 못했다. 시간만 흘려보낸 탓에 에너지 공기업의 경영 부실 문제는 현재 진행형이다.

이 과정에서 전체 공공기관 규모는 오히려 비대해졌고 경영상 구멍은 더 커졌다.

공공기관 경영정보 공개시스템(알리오)에 따르면 전체 공공기관 임직원 정원은 2015년 31만4215명에서 2019년 기준 42만2455명으로 4년 사이 34.4% 급증했다. 경영 실적은 거꾸로다. 이 기간 부채 규모는 504조7000억원에서 525조1000억원 불었다. 부채 비율은 182.6%에서 156.3%로 낮아지긴 했지만, 빚이 줄어서가 아니라 덩치(자산)가 빠른 속도로 증가해서다.

김동원 전 고려대 경제학과 초빙교수는 “정부가 주목해야 하는 문제는 단편적으로 드러난 직원 비리가 아닌 공공 부문의 무분별한 확대로 인한 부작용인 총체적 비효율, 도덕적 해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김 교수는 “LH 투기는 공공기관 전체 문제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라며 “현 정부는  LH 등 공공 부문의 역할을 무리하게 확대하며 시장을 왜곡시켰으며, 이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경제 회복의 걸림돌만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세종=조현숙 기자 newear@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