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같은 곳 찍었다, 그렇게 탄생한 사진 1장의 경고

365일 같은 곳 찍었다, 그렇게 탄생한 사진 1장의 경고

중앙일보

입력 2021.03.15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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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4면

한기애 작가가 1년 중 미세먼지 농도가 높은 날 서울의 풍경을 모아서 만든 사진 작품 '13월'. 한기애

한기애 작가가 1년 중 미세먼지 농도가 높은 날 서울의 풍경을 모아서 만든 사진 작품 '13월'. 한기애

1년 365일, 아침마다 아파트 옥상에 올라 똑같은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다. 미세먼지로 뒤덮인 서울의 잿빛 풍경을 담기 위해서다. 사진작가 한기애(59)씨 얘기다.

14일 서울 충무로의 한 갤러리에서 전시회 〈Fine Dust II : 14월〉를 열고 있는 그를 만났다. 아주 작은 갤러리 안에는 서울 풍경을 담은 14장의 사진이 전시돼 있었다. 배경과 구도가 모두 똑같은 사진들이다. 한가운데 잠실 올림픽경기장과 올림픽공원이 펼쳐져 있고, 멀리 아파트와 빌딩 숲 사이로 초고층 건물인 롯데월드타워가 우뚝 솟아 있었다. 다만 하늘과 공기 색만 달랐다.

“매일 촬영한 풍경의 조각들을 하나씩 떼어내 한 달의 시간을 압축해 볼 수 있도록 달력 양식으로 만들었어요. 같은 풍경이 날씨와 미세먼지에 의해 달마다 어떤 모습으로 달라지는지 한눈에 감상할 수 있도록 말이죠.” -한기애 작가

한기애 작가가 2019년 9월~2020년 8월 서울의 미세먼지 풍경을 촬영한 사진을 모아 달력 형식으로 만든 작품 사진들. 한기애

한기애 작가가 2019년 9월~2020년 8월 서울의 미세먼지 풍경을 촬영한 사진을 모아 달력 형식으로 만든 작품 사진들. 한기애

그의 말대로 매일 촬영한 사진에서 잘라낸 29~31장의 조각들이 퍼즐처럼 모여서 한 달의 캘린더가 되고, 1월부터 12월까지 총 12장의 사진이 완성됐다. 4~10월에는 하늘도 대체로 파랗고 건물들도 선명하게 보였지만,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마치 필터를 끼운 것처럼 뿌연 날이 더 많았다. 특히, 12월은 롯데월드타워가 먼지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사진 옆에는 한 씨가 매일 기록한 초미세먼지(PM2.5)와 미세먼지(PM10) 농도가 적혀 있었다.

한기애 작가가 기록한 2020년 2월의 미세먼지 및 초미세먼지 농도. 한기애

한기애 작가가 기록한 2020년 2월의 미세먼지 및 초미세먼지 농도. 한기애

이 사진들은 어떻게 찍었나
"재작년 9월 1일부터 작년 8월 31일까지 1년간 작업을 했어요. 매일 오전 10시에서 11시 사이에 올림픽선수기자촌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똑같은 사진을 찍었죠. 랜드마크가 있고 서울의 계절변화를 보여줄 수 있는 곳을 찾다가 롯데월드타워와 올림픽공원이 보이는 이 장소를 택했어요."
한기애 작가가 서울의 한 아파트 옥상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한기애

한기애 작가가 서울의 한 아파트 옥상에서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 한기애

하루도 빠지지 않고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사진을 찍는 건 쉽지 않았을 텐데
"비가 오고, 눈이 오고, 태풍이 덮쳤을 때도 카메라를 수건으로 감싸면서 사진을 찍었어요. 하루라도 빠지면 제 계획이 무산되는 거니까 자신을 채찍질했죠. 그런데 예상치 못한 복병이 있었어요. 5월에 아파트에서 방수 공사를 하는 바람에 옥상에 올라갈 수가 없었던 거죠. 그래서 5월 마지막 일주일만 비어 있어요."

“잿빛 13월은 서울의 암울한 미래”

한기애 작가의 사진 작품 '0월'과 '13월'. 1년 중 미세먼지가 없는 날과 심한 날의 서울 풍경을 모아 만들었다. 한기애

한기애 작가의 사진 작품 '0월'과 '13월'. 1년 중 미세먼지가 없는 날과 심한 날의 서울 풍경을 모아 만들었다. 한기애

14장의 사진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 ‘0월’과 ‘13월’이었다. ‘0월’의 서울이 청명한 하늘 아래 깨끗한 도시의 모습이었다면, ‘13월’은 마치 암울한 미래 세계에 온 것처럼 잿빛 도시로 변해 있었다.

한 씨는 “0월과 13월은 미세먼지가 가장 좋은 날과 나쁜 날을 골라서 각각 만든 인위적인 달력”이라며 “0월은 인간의 문명 이전에 맑았던 공기, 유토피아를 상징한다면, 13월은 인간의 물질문명이 향하는 암울한 디스토피아적 미래상을 상징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갤러리를 방문한 보일러 업체 대표가 회사에 걸고 싶다면서 두 작품 모두 구매했다”고 했다.

“인간에게 주는 경고장이자 나의 반성문”

〈Fine Dust II : 14월〉 전시회를 열고 있는 한기애 작가. 한기애

〈Fine Dust II : 14월〉 전시회를 열고 있는 한기애 작가. 한기애

교사로 일하던 한 씨는 40대 후반에 뒤늦게 사진의 매력에 빠졌다. 이후 그는 2016년부터 미세먼지로 뒤덮인 서울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기 시작했다.

왜 미세먼지 사진을 찍기 시작한 건가
"2015년에 필리핀에 석 달 정도 머물다가 한국에 돌아왔고 얼마 뒤 한강 변을 지나는데 미세먼지가 낀 서울의 풍경이 답답한 지옥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이게 바로 우리 시대의 풍경이다. 이걸 기록해서 남겨놓자는 막연한 생각에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미세먼지가 좋은 날과 나쁜 날 서울 한강변의 모습을 합성한 사진. 한기애

미세먼지가 좋은 날과 나쁜 날 서울 한강변의 모습을 합성한 사진. 한기애

그는 1년간의 기록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미세먼지 사진은) 지구별을 더럽히는 인간들에게 주는 경고장이자 나의 반성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도 나 역시도 보태고 있는 거니까요. 개인이 할 수 있는 실천이 있으면 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우린 0월의 삶으로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천권필 기자 fee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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