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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2035

명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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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하준호 기자 중앙일보 기자
하준호 사회1팀 기자

하준호 사회1팀 기자

이 고단한 직업을 왜 선택했느냐고 누가 물으면 ‘짜릿함’으로 답을 대신하곤 했다. 2017년 8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참석한 수요집회에서 무심코 말을 걸었다가 그가 일본인임을 알고 느꼈던, 2018년 3월 인적이 드물었던 국회의 한 회의장에서 흘러나온 음성을 우연히 듣곤 미친 듯이 수첩에 메모하던 때 느꼈던 그런 감정 말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과 참여연대가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3기 신도시 투기 의혹을 제기한 지난 2일 이후 공공의 적(敵)이 된 LH 직원들도 같은 경험을 했을까. 투기 의심을 받는 땅 매입을 전후로 일종의 ‘짜릿함’을 느꼈을 테니 말이다. 남들은 모르는 정보를 알게 된 뒤 느꼈을 희열, 잔금을 치르고 등기 이전을 하면서 그렸을 나와 내 가족의 설레는 미래는 그들의 눈을 멀게 만들었을 것이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불법 땅 투기 의혹 규명엔 검·경만이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도 명운을 걸어야 한다. [뉴스1]

한국토지주택공사(LH) 직원들의 불법 땅 투기 의혹 규명엔 검·경만이 아니라 문재인 대통령도 명운을 걸어야 한다. [뉴스1]

시세 차익을 거두기 위한 투기는 옳은 행동은 아니나 그 자체로 범죄라고 보긴 어렵다. 핵심은 수도권 신도시 개발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LH의 직원들이 남들은 알 수 없는 내부 정보를 이용했느냐다. 그렇다면 누가 최초로 내부 정보를 유출했고, 어떻게 유통됐는지 밝혀내는 게 최우선 과제다. 그 길목에 있는 이들이 잠재적 용의자여서다. 하지만 정책이 결정되고 유통된 핵심 경로인 청와대·국토교통부로 수사망을 넓힌단 소식은 아직 들리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 정직하게 일했던 LH 구성원 다수의 허탈감은 커지고 있다. 내부 정보를 이용한 투기꾼보다 자신이 ‘국민 주거안정의 실현과 국토의 효율적 이용’(LH 미션)에 이바지한단 자부심으로 살아왔던 이들이 더 많았을 터.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LH 직원은 유서에 “국민께 죄송하다”는 글을 남겼다고 한다. 진짜 범죄는 베일 뒤에 숨어 있는 사이 애꿎은 이들만 자괴감 속에 살고 있다.

삶과 죽음에 각별히 민감해하던 문재인 정부다. “해체 수준의 환골탈태”(정세균 총리)를 말하지만 “해경을 해체하겠다”(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던 박근혜 전 대통령의 말보다 감수성이 옅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이번에도 국가 의사결정 체계의 구조적 문제는 경시되고 있다. 그 체계 속 부실한 정보 관리와 불법 기밀유출 등은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고 오로지 LH 때려잡기에만 혈안이 된 것 같다.

이런 지적이 검찰 내부에서도 나오자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이렇게 쏘아붙였다. “수사권이 있을 땐 뭘 했느냐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 2018년 당시 여당의 적폐청산위원장이었던 박 장관은 “부동산 적폐”(문 대통령)엔 손 놓고 뭘 했나. 정부 안에서 일어난 일이건만 이 정부의 최종 책임자인 문 대통령의 진심 어린 사과도 아직 들어본 적 없다.

문 대통령이 경찰에, 박 장관이 검찰에 걸라고 주문하는 그 ‘명운’은 그들이 먼저 걸면 좋겠다.

하준호 사회1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