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몇방울로 260개 병 진단"…'여성 잡스'서 사기꾼 된 홈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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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몇 방울로 병 260여 개를 진단할 수 있다고 주장해 사기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엘리자베스 홈스 전 테라노스 CEO. AP=연합뉴스

피 몇 방울로 병 260여 개를 진단할 수 있다고 주장해 사기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엘리자베스 홈스 전 테라노스 CEO. AP=연합뉴스

‘여성 스티브 잡스’라고 불리며 벤처 신화에 등극했다가 세기의 사기꾼으로 전락한 엘리자베스 홈스(37)의 재판이 한 차례 더 미뤄질 전망이다. 2019년 발간된 책 『배드 블러드』로 유명해진 실리콘밸리 사상 최대 사기극 ‘테라노스 사건’ 의 전말 역시 드러나는 데 시간이 걸리게 됐다.

12일(현지시간) CNN은 “엘리자베스 홈스의 재판 시작일이 미뤄질 새 변수가 생겼다”며 “그가 임신 중이기 때문”이라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홈스 측은 이달 초 “오는 7월 출산 예정이어서 첫 기일을 6주 미뤄야 한다”는 문서를 캘리포니아 북부지방법원에 제출했다. 당초 첫 기일은 7월13일이었다. 뉴욕포스트 등은 홈스의 임신 소식을 전하며, 지난 2019년 결혼한 에반스 호텔 그룹의 상속자 빌리 에반스(29)와의 사이에 생긴 아기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엘리자베스 홈스는 지난 2018년 사기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로이터=연합뉴스

엘리자베스 홈스는 지난 2018년 사기 등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로이터=연합뉴스

외신들은 홈스가 법정에 출석하기 어려운 만큼 재판이 연기될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2018년 6월 사기 등 혐의로 기소된 홈스는 지난해 여름 첫 재판을 앞두고 있다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재판이 무기한 연기됐다. 당시 CNBC에 따르면, 검찰이 공개한 170명의 증인은 각각 15개 주에 살고 있던 데다가, 이 중 16명은 코로나19 고위험군인 65세 이상이라 재판 출석이 어려웠다.

“극소량 혈액으로 260여 개 병 진단”

1984년 미국에서 태어난 홈스는 어릴 적 부모와 함께 중국에서 오래 살았던 덕에 중국어에 능통했다. 스탠퍼드대에서 화학을 전공한 그는 재학 중 싱가포르의 한 바이오 연구소에서 인턴으로 근무했고, 이때의 경험을 살려 2003년 의료 스타트업 테라노스를 설립했다. 이후 2012년 손가락 끝을 찔러 얻은 피 몇 방울로 260여 개 병을 진단할 수 있다는 ‘에디슨 키트’를 발표하면서 벤처업계 신화로 떠올랐다. 당시 의학계에선 혈액이 채취 과정에서 오염될 수 있고, 많은 병을 진단하기 위해선 상당량의 혈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스탠포드대라는 '스펙'과 뛰어난 '언변'을 지닌 홈스 자체가 상품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투자자가 몰렸고, 그는 자연스레 ‘젊은 천재 여성 CEO’ ‘여자 스티브 잡스’ 등의 별명을 얻었다. 테라노스의 기업 가치가 2014년 한때 90억달러(약 10조 2200억원)를 넘으며, 회사 지분 50%가량을 보유했던 홈스는 자수성가한 최연소 여성 억만장자에 등극하기도 했다.

2014년 미국 경제지 포춘의 표지를 장식했던 엘리자베스 홈스. [포춘 캡쳐]

2014년 미국 경제지 포춘의 표지를 장식했던 엘리자베스 홈스. [포춘 캡쳐]

진실이 드러난 건, 2015년 월스트리트 저널(WSJ)의 보도를 통해서다. WSJ는 테라노스의 전 직원 등을 취재해 에디슨이 실제로 진단할 수 있는 병은 10여 개 정도이고, 그 외 질병은 이미 출시된 다른 기업의 기기로 가려낸 것이라고 밝혔다. 이듬해 테라노스는 주식 시장에서 퇴출당했고, 홈스의 자산 역시 45억달러(5조 1100억원)에서 하루아침에 0원이 됐다. 2018년 홈스와 그의 전 남자친구이자 테라노스 최고운영책임자(COO)였던 라메시 서니 발와니는 재판에 넘겨졌다.

사기 비결은…이미지 메이킹과 저명인사의 지지 

엘리자베스 홈스는 금발로 염색하고, 검은색 터틀넥을 즐겨 입었다. 그는 여자 '스티브 잡스'란 별명을 얻었다. 중앙포토

엘리자베스 홈스는 금발로 염색하고, 검은색 터틀넥을 즐겨 입었다. 그는 여자 '스티브 잡스'란 별명을 얻었다. 중앙포토

‘속 빈 강정’이었던 테라노스를 ‘유니콘’에 오르게 한 건 홈스의 ‘이미지와 스토리텔링’ 전략 덕분이었다. 실리콘밸리의 모체로 여겨지던 스탠퍼드대를 19세에 중퇴한 점은 하버드를 그만둔 빌 게이츠와 마크 저커버그 등을 떠올리게 했다. 또 그는 노란 금발과 검은 터틀넥 스웨터, 낮은 목소리를 이용해 젊은 엘리트 이미지를 구축했다.

특히 헨리 키신저, 조지 슐츠 전 미 국무장관과 제임스 매티스 전 국방장관 등 저명인사들이 테라노스를 극찬하면서 성공신화는 더 부풀려졌다. 미디어 재벌 루퍼트 머독은 1억2000만달러(약 1363억원)를 투자했다. 그가 소유한 WSJ의 보도로 홈스가 몰락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벌어진 셈이다.

김선미 기자 calli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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