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오래]문종 세자빈 2명 생별, 1명 사별…자선당의 비극

중앙일보

입력 2021.03.14 13:00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38) 

조선시대의 왕세자의 정당으로 동궁이라 불린 건물은 경복궁의 자선당, 창덕궁의 중희당, 창경궁의 시민당이 있었다. 동궁은 왕세자가 거처하면서 왕 위에 오르기 전에 공부하고 세자로서의 업무를 보던 곳이다. 조선 초기 동궁에 관한 기록으로는 태종 18년(1418) 6월 세자익위사를 따로 설치한 걸 보면 이미 동궁이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세자는 왕위 계승의 제1순위에 있는 왕자를 가리키는 말이다. 왕세자의 자리는 왕비가 낳은 왕의 적장자가 잇는 것이 원칙이며 경칭은 저하(邸下)다. 다른 말로는 동궁(東宮), 춘궁(春宮), 이극(貳極), 국본(國本) 등이 있다.

경복궁 동문 건춘문 안쪽에 있는 자선당은 다음 보위를 이어 갈 왕세자의 동궁전(東宮殿)이다. 궁궐의 동쪽에 지은 동궁(東宮)은 왕세자가 거처하는 집을 가리키는 말이면서 동시에 왕위 계승권자인 세자를 일컫는 말이다. 이때 왕세자의 집을 동쪽에 지은 이유는 동쪽의 개념이 봄을 상징하고 만물은 봄에 소생하기 때문이다. 다음 왕위를 이을 왕세자의 공간을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생명력이 가장 강한 동쪽 방위에 두어, 그 기운을 이어가게 하려 했음이다. 예를 들면 세자 책봉례를 봄에 하는 것도 생명의 기운이 작동하는 계절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동궁 권역은 세자를 제왕으로 만들기 위한 시설이 포진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동궁에는 세자와 세자빈의 생활공간, 세자궁에 딸린 내관의 처소, 세자가 신하들부터 조하를 받는 조당이 포함된다. 또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서연이나 시강 등의 강학을 받는 교육장과 세자를 위한 책고와 세자를 호의하는 시설 등이 있다. 경복궁의 동궁전은 근정전과 사정전의 동편에 있고 그 영역은 자선당과 비현각(丕顯閣)으로 구분되어 있다. 자선당은 왕세자와 세자빈의 생활공간이고 비현각은 세자의 집무공간이다. 동궁전 앞에는 세자를 교육하고 보필하는 임무를 맡았던 세자시강원(춘방(春坊))과 세자를 경호하는 임무를 맡았던 세자익위사(계방(桂坊))가 있어 세자를 다음 왕위를 이어갈 재목으로 키워갔다.

경복궁 동문 건춘문 안쪽에 있는 자선당은 다음 보위를 이어 갈 왕세자의 동궁전이다. [사진 Rheo1905 on Wikimedia Commons]

경복궁 동문 건춘문 안쪽에 있는 자선당은 다음 보위를 이어 갈 왕세자의 동궁전이다. [사진 Rheo1905 on Wikimedia Commons]

집의 이름 ‘자선(資善)’은 착한 성품을 기른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문종이 20여 년간 세자노릇을 했고 1441년에는 단종이 태어났다. 세자빈 권씨(현덕왕후)가 세종 23년 7월 23일 자선당에서 단종을 낳고 하루 만에 죽었다. 만약 현덕왕후 권씨가 그렇게 일찍 죽지 않았다면 세조의 왕위찬탈과 같은 비극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고종 25년(1888) 경복궁 중건 후에는 고종의 왕세자 순종이 자선당에서 거처했다.

“자선당(資善堂) 안의 행랑 전각 남쪽문은 중광문(重光門), 북쪽문은 육덕문(毓德門), 바깥 행랑 전각의 남쪽문은 이극문(貳極門)이다. 비현각(丕顯閣)의 남쪽문을 이모문(詒謨門)이다.”

세종은 세자 문종이 자선당에 살면서 여러 불행한 일을 겪고 더구나 세자빈이 단종을 낳고 하루 만에 죽자 그 다음 날 세자의 거처를 자선당으로 그대로 둘 것인지, 다른 곳을 마련할 것인지에 대해 신료들과 의논했다.

◆세종 23년(1441) 7월 25일 3번째기사자선당 밖에 한 궁을 따로 지어 세자를 살게 하다임금이 승정원에게 이르기를 “궁중에서 모두 말하기를, 세자(世子)가 거처하는 궁에서 생별(生別)한 빈(嬪)이 둘이고, 사별(死別)한 빈이 하나이니, 매우 상서롭지 못하다. 마땅히 헐어 버려 다시 거기에 거처하지 말게 하자고 한다. 하물며 동궁(東宮)은 다른 곳에 비할 것이 아니니 진실로 헐어 버릴 수 없고, 세자가 또 궁성(宮城) 밖에 거처할 수도 없는 것이다. 다만 궁우(宮宇)가 얕고 드러나서 거처하기에 마땅치 아니하므로, 자선당(資善堂) 밖에다 따로 한 궁(宮)을 지어서 살게 하려고 하니, 의논하여 아뢰라”하니…

세종 대에 처음 지었을 당시의 자선당은 고종대에 지은 자선당의 규모와는 상당 부분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승화당(承華堂)과 같이 동궁영역에 있던 자선당은 세종이 신료들을 불러 정사를 논하고 가끔 마당에서 구기를 즐기던 용도로 쓰였다. 그리고 왕세자는 자선당에서 새해 정월 초 백관들로부터 하의(賀儀)를 받고 생신 하례(賀禮)도 받았다. 그러나 이후 세자 문종이 처소로 사용하던 자선당에서의 불행이 계속되자 세종은 신하들과 의논하여 문종이 머물 처소를 따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건강이 나빠지자 세자 문종으로 하여금 대리 업무를 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자선당과 승화당은 왕이 임어하는 처소이므로 왕세자 문종이 자선당 임금의 위치에서 남면(南面)할 수 없으니, 동궁 정문에서 남면해 앉고 1품 이하는 뜰아래에서 재배(再拜)하고 세자는 답배하지 않도록 하라고 명했다(세종 25년 4월 20일). 그리고 왕세자가 신하들로부터 조회 받을 집을 동문 건춘문 안에 짓고, 이름을 ‘계조당(繼照堂)’이라 불렀다. 문종은 대리청정 기간 동안 계조당에서 신하들의 조참을 받고 일본국 사신을 맞이하였으며 승화당에서 정사를 보았다. 고종실록에는 이를 두고 “세종 대에 동궁의 전각으로 자선당과 승화당이 있었는데, 임금께서 임어하시므로 다시 계조당을 세우고 왕세자가 하례를 받는 전각으로 삼았다”고 했다.

이후 단종 즉위년에 문종의 뜻을 따라 계조당을 철거한 뒤 복구하지 않았다. 계조당이 대리청정 업무를 위한 왕세자의 조당으로 사용한 집으로 문종이 즉위한 후에는 계조당의 용도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종이 승하하자 단종은 자선당을 수리해 혼전으로 삼았다. 1개월 뒤 다시 먼저 승하한 현덕왕후의 신주를 자선당으로 옮겨와 왕과 왕후의 혼전으로 삼고 경희전(景禧殿)이라 이름 붙였다.

일제시대 수탈됐던 경복궁의 자선당. [중앙포토]

일제시대 수탈됐던 경복궁의 자선당. [중앙포토]

 단종 즉위년(1452) 6월 20일 2번째기사현덕 왕후의 신주를 자선당에 옮겨 봉안하고 경희전으로 칭하게 하다처음에 현덕 왕후(顯德王后) 혼전(魂殿)을 경희전(景禧殿)이라 칭하였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예조에서 계입(啓入)하기를 “대행 대왕 반혼(返魂) 우제(虞祭) 후에 현덕 왕후의 신주를 또한 자선당(慈善堂)에 옮겨 봉안하고 인하여 경희전이라 칭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우제란 상례 때에 장사를 치르고 곧 지내는 제사로 초우(初虞), 재우(再虞), 삼우(三虞)가 있다.

이후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경복궁을 고종 5년(1868)에 중건하면서 자선당의 동궁 영역도 중건되었고 이때 계조당도 복원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계조당은 여러 행사 때 왕세자가 축하를 받는 곳으로 사용하다가 1891년 계조당을 변형하여 다시 지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북궐도형이나 경복궁 평면도에 보이는 계조당은 문을 제외하고 칸의 용도를 적지 않았으며, 1907년 당시 계조당이 이미 기능을 상실했고 행각은 헐리고 없어졌다. 계조당은 신하가 왕세자에게 조하를 드리고 진찬을 여는 등 동궁의 정당(正堂)으로서의 기능 뿐 아니라 조선 왕조의 권위와 후계의 연속성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공간이었으나 일제강점기인 1915년의 조선물산공진회를 거치며 완전히 사라졌다.

이처럼 고종 대의 자선당 일곽은 일제강점기에 크게 훼손 되었다가 자선당(資善堂:왕세자와 왕세자빈의 거처)과 비현각(丕顯閣:왕세자의 집무실) 만이 1999년 복원되었다.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는 2022년까지 경복궁 계조당을 복원하여 왕세자의 공간인 동궁 권역의 기본 궁제를 복원할 계획이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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