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X나 꼴보기싫어"…교묘한 괴롭힘 '직폭'에 오늘도 울었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밀레니얼 실험실’ 외 더 많은 상품도 함께 구독해보세요.

도 함께 구독하시겠어요?

직장인 스트레스. 사진 pxhere

직장인 스트레스. 사진 pxhere

어느 직장인의 하루

[발신인 : A 팀장]
"야, 이거 영업직 교육자료인데 오늘 안에 강의 준비 다 끝내. 
못 마치면 퇴근 없어.
그리고 업무 시간엔 하지 마.
개인적으로 알아서 준비해라."

[밀실]<제62화> #지옥 된 일터, 피해자들의 고백

이메일함에 새로운 알림이 떴다. 열어보니 500장 넘는 파워포인트(PPT) 파일이 담겼다.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다른 업무 지시가 또 떨어졌다. 이젠 익숙하다. 지난 두 달 주말에도 쉬지 못하고 집과 회사를 왕복했으니까.

몸도 마음도 지쳐 병원을 찾았다. 얼마 전부터 목에 잡히던 혹이 주먹만하게 부풀어올랐다. 의사는 "암일 수 있으니 당장 대학병원을 가라"고 말했다. 하지만 오늘도 어쩔 수 없이 회사로 향했다. A 팀장이 비아냥거리던 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어디 아파? 아니면 왜 그렇게 병원을 자주 가? 너 건강염려증 아냐?"

모든 동료가 보는 앞에서 매일 쏟아지는 폭언. 처음엔 날 걱정하는 듯했던 동료들도 이젠 못 본 척 제 할 일만 한다. 투명인간이 된 것 같다. 이대로 다니다간 몸과 마음의 병이 깊어질 것 같다.

윤지비가 일했던 사무실의 모습. 본인 제공

윤지비가 일했던 사무실의 모습. 본인 제공

어느 직장인의 고백입니다. 지어낸 이야기라고요? 유튜버 윤지비(활동명·30)가 실제로 겪었던 일입니다. 그는 6년 전 치열한 경쟁을 뚫고 대기업에 입사했습니다. 하지만 5년 만에 떠밀리듯 회사를 떠나야 했습니다. 회사 생활 내내 옥죄었던 직장 내 괴롭힘 때문이었죠.

문제는 부서 직속 상사였던 A 팀장이었습니다. 걸핏하면 다른 직원들 앞에서 서류를 집어 던졌죠. "너 때문에 망했다"며 고함을 지르는 건 일상이었습니다. 윤지비는 우울증과 공황장애, 사회불안장애를 진단받고 결국 사표까지 냈습니다.

10명 중 4명, 직장 내 괴롭힘은 '진행형'

지난해 '직장갑질 금지법' 시행을 기점으로 1년간 직장 내 괴롭힘을 겪었다고 답한 이의 통계. 석예슬 인턴

지난해 '직장갑질 금지법' 시행을 기점으로 1년간 직장 내 괴롭힘을 겪었다고 답한 이의 통계. 석예슬 인턴

단지 운이 나빴던 이의 불행은 아닙니다. 시민단체 직장갑질119의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시행된 때를 기점으로 1년간 10명 중 4명 이상(45.3%)은 직장에서 괴롭힘을 겪었다고 답했습니다. 윤지비 같은 피해를 회사 생활 중 언제든 겪을 수 있다는 의미죠.

유명 운동선수나 연예인에게 과거 학교 폭력을 당했다고 고백하는 '학폭 미투'가 연일 이어집니다. 국민의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데요. 직장 내 괴롭힘도 피해자가 가해자를 매일 반강제로 마주해야 한다는 점에서 학폭과 비슷하죠. 어감의 차이만 있을 뿐 '폭력'과 '괴롭힘'은 종이 한 장 차이 아닐까요. 학폭만큼 '직폭'도 매우 심각한 문제인 거죠.

지난 9일 밀실팀과 만나 인터뷰한 유튜버 윤지비. 백경민

지난 9일 밀실팀과 만나 인터뷰한 유튜버 윤지비. 백경민

직장 내 괴롭힘이 학교 폭력과 다소 다른 점은 직급과 서열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직접 때리거나 막말하지 않아도 위에서 아래로 괴롭힘이 가해질 수 있는 구조죠. 고용노동부는 직장 내 괴롭힘을 '사용자·근로자가 직장에서의 지위·관계 등의 우위를 이용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다른 근로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근무 환경을 악화시키는 행위'로 정의합니다.

윤지비의 팀장도 직급과 서열을 활용했습니다. 그를 쏙 빼고 회의를 진행하는가 하면, 업무 관련 메일도 일부러 전달하지 않았죠. 손꼽아 기다리던 여름 휴가 전날엔 과도한 업무를 던져준 뒤 "밤새워서라도 끝내고 가라"며 엄포를 놓았다고 합니다. 교묘한 방식으로 괴롭히며 결국 손을 들게 만든 거죠.

"밥줄 걸려 있으니 버틸 수밖에…"

지난 9일 밀실팀과 만나 인터뷰한 작가 지망생 지지. 백경민

지난 9일 밀실팀과 만나 인터뷰한 작가 지망생 지지. 백경민

밀실팀이 만난 '직폭' 피해자들은 고통스러운 나날을 그저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놓습니다. 좋든 싫든 '밥줄'이 걸린 직장에서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죠. 학폭과 달리 다 큰 성인이라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수도권의 한 주민센터에서 계약직으로 일했던 작가 지망생 지지(활동명·27)는 같은 사무실에 근무한 공무원 '사수'의 괴롭힘에 시달렸습니다. 업무 중 짜증 섞인 말투로 일관하는 사수에게 문제 제기도 해봤습니다. 하지만 돌아온 건 폭언뿐이었죠.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일도 XX 못하는 게 XX 꼴 보기 싫다"….

지지가 실제로 작성한 진술서에 적힌 직장 사수의 폭언. 본인 제공

지지가 실제로 작성한 진술서에 적힌 직장 사수의 폭언. 본인 제공

그날 이후 사수는 그를 투명인간처럼 대했습니다. 하지만 쉽사리 일터를 박차고 나올 순 없었습니다. 지지는 "코로나 시국에 다른 곳에서 일을 찾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 그저 최대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합니다.

참고 또 참았지만 그럴수록 우울증 증세가 심해졌습니다. 결국 일을 시작한 지 8개월 만에 사직서를 냈습니다. 그는 퇴사 후 산업재해 처리를 기대하며 노동부에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했습니다. 하지만 처리 결과는 가해자 '훈계' 조치였다고 해요. 지금은 대출금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직장갑질 금지법? 단 3%만 '신고해봤다'

지난해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해봤다는 비율은 3%에 그쳤다. 석예슬 인턴

지난해 직장갑질119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해봤다는 비율은 3%에 그쳤다. 석예슬 인턴

뿌리 깊은 직장 내 괴롭힘, 정부도 마냥 손 놓고 있던 건 아닙니다. 2019년 정부는 직장 내 괴롭힘을 근절하고자 이른바 '직장갑질 금지법'을 시행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강제성이 없는 권고 수준의 조항에 그칩니다.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아서, 불이익을 당할까봐, 신고 자체를 망설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해 직장갑질119 조사에 따르면 '직장 내 괴롭힘을 신고해본 적 있다'고 답한 사람은 3%에 불과했죠.

피해자들은 직장 내 괴롭힘 관련법이 개선돼야 한다고 입을 모읍니다. 가해자의 행동을 바로잡고, 신고자를 보호하는 데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겁니다.

윤지비는 "때로는 괴롭힘을 지켜보는 방관자들이 문제를 더 키운다. 누구든 가해자를 신고했을 때 보호받을 수 있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지지는 "직장 내 폭력 예방 교육은 보여주기식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실질적으로 가해자의 행동을 개선할 수 있는 상담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사회생활 '스트레스' 아닌 폭력 '피해'

한 고용노동지청에 설치된 직장 내 괴롭힘 신고센터. 뉴스1

한 고용노동지청에 설치된 직장 내 괴롭힘 신고센터. 뉴스1

많은 직장인이 일터에서 겪는 고통을 사회생활에 으레 따라오는 스트레스로 치부합니다. 자신에겐 폭력이지만 다른 사람에겐 별일 아닌게 아닐까 끝없이 의심하기도 하죠. '다 큰 어른이 뭘…'이라는 손가락질도 두려워합니다. 그렇게 외면한 상처는 깊어지고 곪을 뿐이죠.

정정엽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지속되면 공황이나 발작, 극단적 선택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 피해자는 우선 자기가 겪은 일이 폭력이라는 걸 명확하게 인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설명했습니다.

밀실팀이 만난 '직폭' 피해자들도 같은 생각입니다. 어렵게 입을 연 학폭 피해자들은 십수년이 지나도 그때의 지옥 같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토로합니다. 직장 내 괴롭힘도 평생 머릿속에 각인될 악몽이죠. 그럴수록 아픈 상처를 마주하고 드러내야 합니다.

"직장 내 괴롭힘은 내가 피해자라는 걸 깨닫기도 어려워요. 용기 내서 말해도 '맞은 것도 아닌데 어른이 왜 이렇게 유난을 떨어. 사회생활이 다 그래'라는 반응만 돌아오거든요. 누가 인정해주지 않아도 '내가 아프다'는 사실은 스스로 의심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작가 지망생 지지)

박건·백희연 기자 park.kun@joongang.co.kr
영상=석예슬 인턴, 백경민

밀실은 '중앙일보 레니얼 험실'의 줄임말로 중앙일보의 20대 기자들이 도있는 착취재를 하는 공간입니다.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