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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색채의 향연, 단순함의 미학 눈에 띄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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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7호 18면

올봄 눈여겨볼 만한 ‘작지만 큰’ 전시 2개가 서울 청담동과 삼청동·보문동에서 각각 열리고 있다. 전시 공간도 크지 않고 작품 개수도 많지 않지만, 수십 년 응축된 공력이 절로 느껴지는 전시다. 

게르하르트 리히터 전 #‘4900가지 색채’ 아홉 번째 버전 #추상·구상 경계 넘나드는 작품 #“루이 비통 패션과 잘 어울려” #탄생 100주년 그라 램프 전 #원하는 방향 조명 ‘관절형’ 시초 #나사·용접 없이 수공으로 제조 #“기능 살리려 단순하게 디자인”

◆게르하르트 리히터 전=청담동 루이 비통 메종 서울 4층에 있는 갤러리 ‘에스파스 루이 비통 서울’에서는 독일의 세계적인 예술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89)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루이 비통 재단 미술관이 소장한 ‘4900가지 색채(4900 COLOURS)’의 아홉 번째 버전을 전 세계 최초로 공개하는 자리다.

현대 미술계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2007년에 만든 ‘4900가지 색채’ 시리즈 중 아홉 번째 버전의 작품. [사진 루이 비통 재단]

현대 미술계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가 2007년에 만든 ‘4900가지 색채’ 시리즈 중 아홉 번째 버전의 작품. [사진 루이 비통 재단]

현대 미술계의 거장인 리히터는 1932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태어나 현재 쾰른에 거주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데이비드 호크니와 견줄 만큼 가격이 높기로 유명하다. 지난해 10월 소더비 홍콩 라이브 경매에서 ‘추상 이미지(Abstraktes Bild) 649-2’가 2억1460만 홍콩달러(약 313억원)에 팔렸는데, 이는 당시까지 아시아 시장에서 낙찰된 서양 작품 중 최고가였다.

미술평론가 이진숙씨는 “1960년대 초기부터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을 꾸준히 선보였고 두 장르 모두에서 뛰어난 가치를 인정받는 유일한 작가”라고 설명했다.

‘4900가지 색채’ 시리즈는 2007년 만들어진 작품으로, 작품을 구성하는 최소 단위가 디본드 소재인 가로·세로 9.7cm의 사각형이다. 이것을 가로로 5개, 세로로 5개를 붙인 것이 ‘패널’이다.

이 패널을 조합해 몇 개의 플레이트(판)로 구성하느냐에 따라 시리즈의 버전이 나뉜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버전은 총 196개의 패널이 플레이트를 이루지 않고 독립적으로 구성된 세트를 이뤘다. 이번 아홉 번째 버전은 4개의 플레이트로 구성됐다. 가장 작은 플레이트에는 9개, 중간 크기는 25개, 가장 큰 것에는 81개의 패널이 연결돼 있다. 4개의 플레이트에 들어간 컬러 사각형의 개수는 총 4900개다.

그렇다고 4900개의 독립적인 색깔이 사용된 것은 아니다. 중복된 컬러도 있는데, 실제 사용된 컬러의 수가 몇 개인지는 정확지 않다.

다만 ‘4900가지 색채’ 시리즈를 제작한 2007년에 리히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훼손된 독일 쾰른 대성당의 남쪽 측랑 스테인드글라스를 복원하는 ‘돔펜스터’ 작업을 동시에 진행했다. 이때 총 1만 1500장의 유리 조각에 중세 시대 본래의 창문에 쓰였던 72가지 색채가 사용됐다고 한다.

흥미로운 것은 ‘4900가지 색채’나 ‘돔펜스터’ 작업에서 색의 배치는 특별히 개발한 컴퓨터 프로그램의 힘을 빌려 자유롭게 구성했다는 점이다. “색의 아름다움을 두고 우열을 가릴 수는 없다”는 게 리히터의 생각인데, 심지어 패널들을 연결해 플레이트를 만들 때도 전시 설치자 또는 큐레이터에게 배치를 맡긴다고 한다. 컬러즈 시리즈의 색 배열이 매번 달라지는 이유다.

이진숙 평론가는 “색깔의 정확한 개수는 무의미하다. 왜냐하면 원래 색채의 세계는 무한하고 수천 개의 컬러 사각형 중 어떤 사람의 눈에는 노랑, 어떤 사람의 눈에는 초록이나 빨강이 더 두드러져 보일 텐데 그것이 현재 그 사람이 꽂혀 있는 색일 것”이라며 “작가의 의도를 배제한 채 관객의 주관적인 시선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기억하도록 하는 게 리히터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 점에서 매년 아름다운 색의 옷을 제시해온 패션 브랜드 루이 비통과 잘 어울리는 작품”이라고 덧붙였다. 벽면을 가득 채운 대형 패널 2점과 소형 패널 2점 등 총 4점을 7월 18일까지 볼 수 있다. 무료인데, 사전 예약이 필요하다.

◆탄생 100주년 그라 램프 전=현대 건축의 아버지 르코르뷔지에가 사랑했던 것으로 유명한 ‘그라 램프(La Lampe GRAS)’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가 갤러리 ‘MGFS100’(삼청동)과 한옥카페 ‘아틀리에 하모니’(보문동)에서 동시에 열리고 있다.

1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코르뷔지에가 가장 사랑했던 ‘그라 램프 211’ 블랙. 관이 두 번 꺾이는 디자인 때문에 ‘더블 엘보 램프’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2 그라 램프를 대표하는 시그니처 모델 ‘205’ 블랙. 3 니켈 소재의 갓을 씌운 ‘207’ 모델. 4 받침에 나무를 덧댄 ‘206’ 모델. [사진 CSH]

1 현대 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코르뷔지에가 가장 사랑했던 ‘그라 램프 211’ 블랙. 관이 두 번 꺾이는 디자인 때문에 ‘더블 엘보 램프’라는 별명으로도 불린다. 2 그라 램프를 대표하는 시그니처 모델 ‘205’ 블랙. 3 니켈 소재의 갓을 씌운 ‘207’ 모델. 4 받침에 나무를 덧댄 ‘206’ 모델. [사진 CSH]

프랑스의 엔지니어이자 발명가인 베르나드-아벵 그라(Bernard-Albin Gras·1886~1943)가 개발해 1920년 특허출원했던 그라 램프는 원하는 위치와 각도로 빛을 움직일 수 있는 ‘관절형 램프’의 시초로 꼽힌다. 70년대까지 20여 종의 모델이 제작됐지만 단종 됐고, 현재는 빈티지 컬렉터들의 관심 품목이 됐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50여 점도 ‘CSH(Crazy·Stupid·Happy의 약자)’라는 예명으로 활동 중인 한국인 컬렉터가 9년 간 수집한 것들이다.

단종된 그라 램프가 빈티지 컬렉터들의 눈에 띄게 된 것은 산업 디자이너 필립 스탁의 영향이 크다. 80년대에 프랑스 광고회사 임원의 집을 꾸몄던 그가 그라 램프를 곳곳에 사용하면서 램프의 아름다움이 재평가된 것. 바로 ‘기능성을 위해 극도로 단순하게 디자인된 순수성’ 이다. 나사와 용접을 사용하지 않고 수공으로 만들어진 그라 램프는 가장 기본적인 선과 구의 형태 만으로 360도 회전이 가능하도록 디자인됐다. 70년대까지 개발된 20여 개의 모델도 치과·안과, 산업 현장, 설계사무소 제도용 책상 등 용도와 설치 목적에 따라 구분된다.

1930년대 제작된 카탈로그. [사진 CSH]

1930년대 제작된 카탈로그. [사진 CSH]

르코르뷔지에가 그라 램프를 사랑했던 이유도 이 ‘기능에 충실한 단순함의 미학’이다. 그는 파리 이주 후 22년부터 65년 사망할 때까지 집과 스튜디오 뿐 아니라 빌라 라 로슈(프랑스), 메종 기에트(벨기에), 빌라 사보아(프랑스), 빌라 르 락(스위스) 등 세계 각지에 위치한 자신의 건축물에 빼놓지 않고 그라 램프를 설치했다.

특히 건축가들의 성지이자 2016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메종 기에트는 현재 벨기에를 대표하는 패션디자이너 앤 드뮐미스터가 소유하고 있는데, 그 역시 자신만의 그라 램프 컬렉션을 갖춘 것으로 알려졌다. 2006년도부터 프랑스 업체 ‘DCW 에디시옹’이 라이선스를 얻어 일부 재생산되고 있지만,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오래된 빈티지 제품으로, 개당 500만원을 호가한다. 21일까지. 무료.

서정민 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meantr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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