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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하다" 피해자 오열···형제복지원 비상상고 기각된 이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1970~80년대 끔찍한 인권유린을 저지른 부산 형제복지원 원장에 대한 1989년 대법원의 무죄 판결은 파기돼야 한다는 검찰의 비상상고를 대법원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다만 대법원은 법리적 한계를 지적하면서도 국가 차원의 진상 규명과 조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주저앉은 피해자들 “억울하고 분하다”

대법원 2부(주심 안철상 대법관)이 특수감금 등 혐의로 기소된 형제복지원장 고 박모씨에 대한 비상상고를 기각한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법정 앞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자 및 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뉴시스

대법원 2부(주심 안철상 대법관)이 특수감금 등 혐의로 기소된 형제복지원장 고 박모씨에 대한 비상상고를 기각한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 법정 앞에서 형제복지원 피해자 및 가족들이 오열하고 있다.뉴시스

대법원 2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형제복지원 원장 고(故) 박인근씨의 특수감금 혐의에 대한 비상상고 사건을 11일 기각했다. 재판부는 "이번 사건은 비상상고 이유인 '그 사건의 심판이 법령을 위반한 때'에 해당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1989년 대법원이 박 원장을 무죄로 확정한 근거는 부랑인 감금을 허용한 과거 내무부 훈령 410조(1987년 폐지)가 아니라 형법 20조였기 때문에 법을 위반한 판결은 아니었다고 본 것이다. 형법 20조 정당행위 조항은 '법령에 의한 행위 또는 업무로 인한 행위 기타 사회상규에 위배되지 아니하는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선고 직후 피해자들은 대법원 법정 앞에 주저앉아 오열했다. 한 피해자는 “학교도 제대로 못 다닌 아이들을 국가에서 잡아들였으면 책임져야 한다”고 소리쳤고, 다른 피해자는 “폭력·감금 등 말도 못 할 생활로 40년 넘게 약을 먹고 살았는데 정부에서 아무런 조치가 없어 억울하고 분하다”고 했다.

박 원장, 보조금 횡령 2년 6개월 살고 나와

형제복지원. 중앙DB

형제복지원. 중앙DB

1975년 설립된 형제복지원은 부랑인을 선도한다는 명분으로 12년간 수용소처럼 운영됐다. 어린아이를 비롯한 시민 3500여명을 불법 감금하고 강제노역과 구타, 학대, 성폭행을 일삼았다는 의혹을 받았다. 복지원 자체 기록에 따르면 12년간 513명이 사망했고 주검 일부는 암매장됐다. 아직 발견되지 않은 시신도 있다.

하지만 박 원장은 국고보조금 등 공금 횡령 혐의로만 2년 6개월의 징역형을 살았다. 특수감금 혐의는 7번 재판 끝에 1989년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로 확정됐다. 박 원장의 행위는 당시 정부 훈령에 기초한 정당행위이기 때문에 위법성이 조각된다며 무죄로 선고한 것이다.

당시 내무부 훈령 제410호는 부랑인을 임의로 단속할 수 있으며 수용인들의 동의나 기한을 정하지 않고 수용시설에 강제 감금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내용을 담았다.

2018년 11월 문무일 당시 검찰총장은 "당시 훈령은 법률이 일체 위임한 바 없고 명확성·과잉금지·적법절차 원칙에도 반하는 '위헌'이기 때문에 이를 직접적 근거로 무죄를 선고한 확정판결은 법령 위반"이라며 대법원에 비상상고했다.

“당시 형법 20조 정당행위 적용…법 위반 아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날 "원심판결에 적용된 법령은 형법 제20조이고, 당시 훈령은 형법 20조 정당행위를 구성하는 사정들 중의 하나에 불과하여 훈령이 위헌인지 등과 관련 없다"라며 원심 판단을 유지했다.

또 "비상상고는 사실관계를 판단하는 재심과 달라서 원심판결에 법령위반이 있는지만을 본다. 형법 제20조 적용 자체는 법령위반으로 볼 수 없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기존 판결이 잘못된 훈령을 따른 것인지 여부는 비상상고 사건의 판단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비상상고의 허용 여부는 피해자들에 대한 피해 회복의 필요성과는 별개로 형사소송법 규정에 따라 동일한 기준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만 재판부는 이 사건에 대한 국가 차원의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언급했다. 재판부는 “이 사건이 갖는 문제의 핵심은 단순히 ‘신체의 자유’가 침해되었다는 점보다 헌법 최고 가치인 ‘인간의 존엄성’이 침해됐다는 점”이라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이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한 활동을 재개할 수 있고 정부의 적절한 조치를 통해 피해자들의 아픔이 치유되어 사회통합이 실현되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박준영 변호사 “국가 불법행위 인정한 데 의의”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을 대리하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가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고 박인근 전 형제복지원 원장에 대한 비상상고가 기각된 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부산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을 대리하고 있는 박준영 변호사가 11일 오전 서울 서초구 대법원에서 고 박인근 전 형제복지원 원장에 대한 비상상고가 기각된 후 입장을 밝히고 있다. 뉴스1

피해자 측을 대리한 박준영 변호사는 선고가 끝난 뒤 “대법원의 판결 이유를 보면 법리적으로 기각할 수밖에 없지만 국가의 조직적인 불법행위를 인정하고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충분한 보상을 받길 바란다고 한 데 의미를 둘 수 있다”며 “피해자들이 하루라도 빨리 국가배상 청구소송에서 국가로부터 피해 배상 받길 간절히 바란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가 재출범하면서 형제복지원 사건은 진상규명을 앞두고 있다. 진실이 규명되면 보상 절차나 관련 소송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박사라 기자 park.sa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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