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형제복지원 기각에 “대법관 집단무결주의…사법개혁 절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부산 주례동에 있던 형제복지원 전경.[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부산 주례동에 있던 형제복지원 전경.[형제복지원 운영자료집]

군사정권 시절 대표적 인권 침해 사건인 이른바 형제복지원 사건을 처음 폭로했던 수사검사가 11일 “과거 군사정권의 법률적 들러리였던 대법관들이 무죄 선고한 사건을 이번에도 대법원이 유지했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1987년 형제복지원 최초 폭로·수사검사 비판

이날 대법원 2부(주심 안철상 대법관)는 1989년 형제복지원 박모 전 원장의 특수감금 혐의를 무죄로 판단한 과거 대법원 판결을 다시 판단해 달라는 검찰총장의 비상상고를 기각했다. “당시 법 적용 논리에는 문제가 없었다”는 취지에서다.

1987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수사했던 김용원 변호사. [페이스북]

1987년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수사했던 김용원 변호사. [페이스북]

김용원(66·사법연수원 10기) 부산항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1987년 부산지검 울산지청 평검사 시절 형제복지원 사건을 파고들어 박 전 원장을 구속기소했던 주인공이다. 당시 지인과 꿩 사냥을 나갔다가 우연히 형제복지원 소속 아동들이 울주작업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장면을 목격하고 인지수사를 통해 형제복지원 사건을 세상에 알렸다.

김 변호사는 이날 페이스북에 ‘형제복지원 사건 비상상고심에 대한 수사검사의 소회’라는 글을 올려 사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 변호사는 “대법원은 군사정권 이래 숱한 과오를 저지르고도 한 번도 자신들의 과오 시인하거나 반성한 적이 없다”며 “잘못된 대법원의 판결도 수사기관의 잘못된 수사 때문이라고 책임을 전가해왔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한국판 아우슈비츠(제2차 세계대전 나치의 유대인 강제수용소)'라고 할 수 있는 형제복지원 사건은 전두환 정권의 법률적 들러리였던 대법관들이 무죄 선고한 사건인데, 이번에도 대법원이 과거 판결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박 전 원장에 대한) 특수감금죄의 무죄 판결을 유지했다”면서다.

이어 “이는 대법관들의 집단 무결주의 때문”이라면서 “이 나라는 검찰개혁보다는 사법부 개혁이 훨씬 절실하다는 나의 오랜 소신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고 말했다.

김 변호사는 “집권여당은 검수완박(검찰수사 완전박탈)이니 헛소리를 할 것이 아니라 당장 형제복지원 관련 피해배상규정이 있는 과거사 진상조사법을 통과시켜야 한다”라고도 목소리를 높였다.

검찰 과거사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김 변호사가 형제복지원 수사 당시 부산 지역 유지였던 박 전 원장을 구속하자, 검찰 수뇌부는 물론 부산시장 등 정계 인사들까지 김 변호사를 강하게 압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당시 부산지검장은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었다.

김 변호사는 검찰을 나온 뒤에도 주로 검찰 수사나 법원의 부당한 판결로 피해를 본 이들을 구제하는 소송을 맡아왔다.

검찰 과거사위는 2018년 진상조사를 통해 검찰총장에게 과거 대법원 판결의 정정을 구하는 비상상고를 권고했고, 문무일 전 검찰총장은 이를 받아들였다.

대법원은 지난해 전원합의체를 통해 이 문제를 논의했고, 선고는 소부에서 내리기로 했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

 1975년~87년까지 부산 북구의 사회복지시설 '형제복지원'에서 일어난 인권 유린 사건을 말한다. 86년 아시안 게임, 88년 서울 올림픽 등을 앞두고 전두환 정부는 '도시 정화 사업'에 따라 부랑인들을 시설에 수용하도록 했는데, 전국 최대 규모 부랑인시설이었던 형제복지원에는 연평균 3000여명, 12년 간 3만 8000여명이 수용됐다. 상당수가 본인 의사에 반해 경찰 등에 의해 강제 수용됐고, 이 안에서 강제노역과 구타, 학대, 살인, 암매장 등이 빈번하게 일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공식 사망자 수는 513명으로 조사됐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