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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박사 아들, 딸 유명 셰프…‘거름 인생’산 수선공 어른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82)

선물 받은 가방끈이 너덜너덜해져 고치러 갔다. 가죽수선은 일반 재봉틀과 틀의 모양이 다르다. 여기저기 물어 찾아간 곳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지붕을 덮어 만든 한 평도 안 되는 기다란 쪽방이다. 재봉틀 두 개가 벽을 보고 나란히 앉아있다. 한 대는 가죽옷이나 가방 같은 것을 수선하고, 한 대는 옷 수선용이다. 그날 내가 놀란 것은 연세가 많은 어르신이 수선공으로 앉아 계시는 거였다. 멋진 양복을 입고 찍은 벽에 걸린 가족사진을 보니 3대의 살아온 인생이 보인다.

수선방을 자세히 보니 입구부터 한쪽 벽에 쭉 붙여놓은 커다란 신문 스크랩이 있다. 누구나 들어오면 바로 읽어야 할 만큼 큼지막하게 붙여 놓았다. 당신의 딸과 아들의 성공뉴스다. [사진 pixabay]

수선방을 자세히 보니 입구부터 한쪽 벽에 쭉 붙여놓은 커다란 신문 스크랩이 있다. 누구나 들어오면 바로 읽어야 할 만큼 큼지막하게 붙여 놓았다. 당신의 딸과 아들의 성공뉴스다. [사진 pixabay]

“내 부친이 옛날엔 양복 만드는 일을 하셨지요. 안동에서는 유명하셨어요. 나도 거기서 기술을 배웠고요. 기성복이 나오면서 사양산업으로 돌아서자 배운 기술을 어쩌겠나. 그래도 이걸로 밥 굶지 않고 자식들 잘 커 준 것에 감사하지요.”

어르신은 자식들이 용돈도 보내주고 큰 집에 도우미가 와서 청소도 해주는 편안한 삶을 살고 계신다. 그래도 날마다 출근할 곳이 있어 좋고, 평생을 친구 되어 함께한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으면 마음이 편안해 좋단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입구부터 한쪽 벽에 쭉 붙여놓은 커다란 신문 스크랩이 있다. 누구나 들어오면 바로 읽어야 할 만큼 큼지막하게 붙여 놓았다. 당신의 딸과 아들의 성공뉴스다. 인터넷 검색란에 이름만 쓰면 알 수 있는 유명한 박사가 된 아들과 유명 셰프가 된 딸이 신문 한 면을 장식해있다. 멋진 뉴스, 자랑스러운 뉴스다.

"이 좁은 세상이 싫어서 자식만큼은 넓은 세상에서 살게 하려고 엄하게 키웠다오. 고생만 하던 부인도 몇 년 전에 먼저 보냈지요. 이제는 여행도 다니고 제발 그만하라 하지만 한 가지 일만 하다가 안 하던 짓을 하려니 할 줄도 모르고 내키지도 않아요. 나는 여기가 자랑스럽고 가장 편하고 좋다오. 허허."

그에게 지금 이곳은 단순한 일터가 아니다. 눈이 잘 안 보이고 어깨도 자꾸 쪼그라져 굽어가니 그걸 아는 단골손님도 이제는 수선을 맡기러 오지 않는다. 그래도 날마다 출근하는 이유는 오가며 들르는 이웃에게 말없이 자식 자랑을 할 수 있는 작은 전시장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벽에 바꿔 붙인 새 뉴스를 보며 부러워하는 것을 보는 재미는 살아온 인생을 보상받는 것 같아 쏠쏠하다. 1m도 안 되는 간격, 좁은 그곳에 끼어 있는 듯한 어르신을 보며 측은함과 애잔함을 느낀 내가 더 부끄러웠다.

가방을 고치러 가서 묵은 인생 이야기를 나누다가 몇 시간이 지났다. 이제 가방을 고칠 시간, 어른은 눈까지 침침해 바늘귀를 못 찾아 몇 번이나 헛손짓을 하신다. 나는 근처에 있는 빵집에서 카스텔라 한 봉지 사 들고 다시 왔지만 그때까지 바늘귀를 찾아 헤맨다. 예전엔 나도 아이들의 옷을 손수 만들어 입힌 기술 있는 재봉사라고 자랑하며 어르신과 자리를 바꿔 앉았다. 집에서 작은 가정용 재봉틀만 만지다가 이런 공업용 재봉틀은 처음이다. 출발 소리부터가 8기통 자동차급이다. 공임은 7000원인데 내가 직접 해서 공짜란다. 그래도 5000원을 손에 쥐여드렸다. 처음 해보는 공업용 미싱이라 오래 기억에 남았다.

세상 소풍 끝나는 날 한 사람의 일생은 옛이야기의 시작이 된다. 자식의 인생을 꿰매고 수놓느라 당신의 삶은 빛나지 않았지만 존경스러운 일생을 사신 분으로 기억된다. 오래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진 pixabay]

세상 소풍 끝나는 날 한 사람의 일생은 옛이야기의 시작이 된다. 자식의 인생을 꿰매고 수놓느라 당신의 삶은 빛나지 않았지만 존경스러운 일생을 사신 분으로 기억된다. 오래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사진 pixabay]

며칠 전 ‘미나리’ 영화에 나오는 저물어가는 주인공 모습에 마음이 싱숭생숭한데, 걷다 보니 하필 그곳을 지나는 길목이다. 벽에 걸린 스크랩사진이 새로운 뉴스로 바뀌었을지 궁금하고 어르신 안부도 궁금해 들렀다. 그런데 입구에 있던 손바닥만 한 간판이 없다. 그 집은 도장집으로 주인이 바뀌어있었다. 잘못 찾은 게 아닌가 하고 물으니 이전 수선하던 집이 맞단다. 어르신이 쓰러져 요양병원에 계시다고 한다.

세상 소풍 끝나는 날 한 사람의 일생은 옛이야기의 시작이 된다. 큰 세상 저편의 일까지 아우르며 크게 이름을 남긴 어른도 있고, 어두운 쪽방에서 평생 자식을 위해 거름 같은 삶을 사신 소박한 어른도 있다. 자식의 인생을 꿰매고 수놓느라 당신의 삶은 빛나지 않았지만 존경스러운 일생을 사신 분으로 기억된다. 오래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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