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통 사극 실종시대… 올해는 볼 수 있을까?

중앙일보

입력 2021.03.07 15:10

업데이트 2021.03.07 15:16

KBS 대하사극 '태조 왕건'의 한 장면 [사진 KBS]

KBS 대하사극 '태조 왕건'의 한 장면 [사진 KBS]

'태조 왕건'(KBS), '허준'(MBC), '여인천하'(SBS).
2000년대 초반 지상파 각 방송사에서 방영해 큰 인기를 끌었던 사극들이다. 종합편성채널이 나오기 전이지만 '태조 왕건'과 '허준'은 60%대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했고, 경빈 박씨의 '뭬이야~'라는 유행어를 히트시킨 '여인천하'는 당초 50회 편성이었다가 150회까지 연장되는 전무후무한 에피소드를 남기기도 했다.

KBS, 2016년 '장영실' 이후 대하사극 실종
수익성 악화, 캐스팅 난색, 짧아진 호흡 등 영향

하지만 더이상 TV에서 대하사극을 찾아보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KBS는 2016년 ‘장영실’을 마지막으로 1TV에서 토요일 저녁 방영하던 대하 사극을 중단했다. 1981년 병자호란 전후 조선을 다룬 '대명'을 방영한 이래 26년 만이었다.
SBS와 MBC도 상황은 비슷하다. 한때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로 인기를 얻었던 MBC는 2000년대 중반부터 정사(正史)와 야사(野史)를 뒤섞은 '대장금' '주몽' '선덕여왕'  등으로 재미를 봤고, SBS도 '뿌리깊은 나무' '육룡이 나르샤' 등 비슷한 경향의 사극을 내보냈다.

드라마 '선덕여왕' [사진 MBC]

드라마 '선덕여왕' [사진 MBC]

이때만 해도 정사를 기반으로 상상력을 얹는 작품이 사극의 주류였지만, 최근엔 고려나 조선 등 시대만 빌려왔을 뿐 실제 역사적 상황은 거의 무시된 팩션 사극들이 이 자리를 채웠다. 호흡도 50부작 이상에서 16부작 남짓으로 짧아졌다.
KBS도 마찬가지다. 최근 방영한 '암행어사 조선비밀수사단'이나 '구르미 그린 달빛'처럼 가상의 조선 시대를 배경으로 허구의 인물을 내세운 작품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처럼 방송사들이 대하사극에 고개를 돌리는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 수익성이다. 대하사극은 출연자가 많다보니 출연료 규모도 크고 소품이나 세트 준비 등 제작비도 많이 든다. 2000년대 제작된 '불멸의 이순신'이나 '대조영'의 경우 총제작비로 350억원 가량 들었다. 반면 PPL(간접광고)을 받기는 어렵다보니 수익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2015년 방영된 KBS 대하사극 '징비록' [사진 KBS]

2015년 방영된 KBS 대하사극 '징비록' [사진 KBS]

지상파 방송사의 한 관계자는 "과거와 달리 지상파에서 황금시간대를 보장받는다고 해도 시청률을 담보할 수도 없고, 광고 수익 면에서도 불리한데 사극에 수 백억원을 쏟아붓기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인기 배우들이 대하 사극 출연에 난색을 표해 캐스팅이 쉽지않다는 문제도 있다. 제작기간은 긴데 출연료는 일반 미니시리즈보다 낮은 편이라고 한다. 과거 '태조 왕건'에서 궁예 역을 맡았던 김영철씨는 "작품을 하는 2년여간 다른 활동은 꿈도 꾸지 못하고 '태조 왕건'에만 집중해야 했다"고 말했다.

KBS 대하사극 '태조 왕건'의 한 장면 [사진 KBS]

KBS 대하사극 '태조 왕건'의 한 장면 [사진 KBS]

여기에 일반 연기와 달리 '사극톤'이라고 하는 발성과 호흡을 익혀야 하고, 여배우는 '가채공포증'에도 시달린다. 가채는 높은 지위의 여성이 기품을 나타내려고 머리에 쓰는 소품인데 무게가 수 kg에 달한다. 과거 배종옥씨는 한 인터뷰에서 "가채를 머리에 올리고 수 시간 촬영을 하다보면 초등학생 한 명을 머리 위에 얹고 생활하는 것 같다. 머리에 쥐가 난 것처럼 쿡쿡 쑤신다. 가채가 머리를 찌르는 가시면류관과 다를 바가 없다"고 고통을 토로한 적이 있다. 심지어 탈모증세까지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넷플릭스 '킹덤' 시즌2 [사진 넷플릭스]

넷플릭스 '킹덤' 시즌2 [사진 넷플릭스]

대하사극보다는 트렌디한 팩션형 사극에 눈을 돌리게 하는 요인으로는 넷플릭스 영향도 있다. 호흡은 짧게 가면서 문화의 장벽은 낮추는 소재를 선호하는 것이다. 조선을 배경으로 한 좀비물로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던  '킹덤'이 대표적인 사례다.
하재근 대중문화평론가는 "영어 문화권이 아닌 한국형 소재가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선 대사는 적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다. 제작자들도 그런 방향으로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역사 이야기만으로는 관심을 얻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 대하사극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정통 사극 그 자체로 가치가 있을 뿐 아니라 최근 팩션 위주로 사극이 짜여지면서 빚어지는 역사에 대한 왜곡된 인식 등에 대해 '균형자' 역할을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KBS의 역할을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다. 일본 공영방송 NHK의 경우 50여년간 대하사극을 끌고가고 있는데, 최근에도 전국시대를 다룬 44부작 '기린이 온다'가 여전한 관심과 인기를 모으는데 성공했다.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는 "KBS가 굳이 tvN 등 다른 방송처럼 트렌드한 팩션 사극을 만들어 경쟁할 필요가 없다. KBS는 오히려 이런 때일수록 다른 방송사가 엄두를 낼 수 없는 대하사극을 과감하게 제작해 공영방송의 가치를 알려야 한다"고 말했다.

NHK가 2020~2021년 방영한 대하사극 '기린이 온다' [사진 NHK]

NHK가 2020~2021년 방영한 대하사극 '기린이 온다' [사진 NHK]

KBS 내부에서도 이런 지적에 공감하는 분위기다. 특히 취임 초부터 대하사극 부활을 내걸었던 양승동 사장은 올해를 그 원년으로 삼았다. 그러나 내부 검토 결과 대하드라마(100부작)을 만들려면 1000억원 가량의 예산이 소요될 것이라는 예상에 좀처럼 탄력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KBS 관계자는 "매년 적자가 누적되는 상황이다보니 일단 검토만 하는 단계"라고 말했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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