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cus 인사이드]흥남항 폭파했던 미군, 인천항은 멀쩡히 공산군에 내준 비밀

중앙일보

입력 2021.03.07 13:00

중공군은 1950년 10월 말 대공세를 펼쳐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을 막았다. 함경남도 장진호로 진출했던 미 해병사단이 철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중공군은 1950년 10월 말 대공세를 펼쳐 국군과 연합군의 북진을 막았다. 함경남도 장진호로 진출했던 미 해병사단이 철수하고 있다. 중앙포토

1950년 12월 5일, 1만 7000여명의 장병과 물자로 구성된 미 8군의 마지막 철수 부대가 탑승한 수송선이 서해안의 진남포항을 떠났다. 그러자 인근에 대기하던 유엔군 함정들이 항구를 파괴하기 위한 대대적인 포격을 개시했다.

중공군 공세, 흥남항 폭파 철수
인천항은 멀쩡히 공산군에 내줘
미군, 그때 이미 북진 포기 전략

그로부터 20여일 후인 12월 24일, 이번에는 동해안의 흥남항에서도 같은 장면을 연출했다. 마지막 수송선 베거함이 출항하자 부두의 주요 시설은 폭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이때 흥남항 외곽 1.5㎞까지 다가온 공산군을 동해 위에서 쏜 함포 사격으로 저지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흥남철수 작전이 이뤄졌다. 10만여명의 병력과 장비 이외에도 10만여명의 피난민을 성공적으로 철수시켰다.

이 때문에 인도적 작전으로 세계 전쟁사에 엄청난 기록을 남겼다. 그러면서 당시의 급박했던 모습을 담은 각종 영상은 통일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찼던 1950년 가을의 북진이 좌절되는 상징처럼 전해진다.

흥남항에서 마지막 출항한 수송선 베거함이 외항으로 빠져나오자 부두가 폭파되고 있다. 만일 재북진 의지가 있었다면 항구는 보존되었을 것이다. [wikipedia]

흥남항에서 마지막 출항한 수송선 베거함이 외항으로 빠져나오자 부두가 폭파되고 있다. 만일 재북진 의지가 있었다면 항구는 보존되었을 것이다. [wikipedia]

하지만 한국전쟁 기간에 해상 철수는 이것이 마지막이 아니었다.

이처럼 허겁지겁 38도선 이북 지역에서 빠져나왔다. 하지만 계속된 공산군 공세로 38도선 방어도 어렵게 됐다. 이에 유엔군사령부 지휘부는 북위 37도선(평택~삼척선)까지 다시 후퇴해서 방어선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수도 서울을 다시 공산군에게 내주겠다는 뜻이다. 이왕 후퇴를 결정한 이상 병력과 물자를 최대한 안전하게 철수해야 했다.

결국 인천항에서 다시 한번 대규모 해상 철수가 시작되었다.

당시 유엔군은 중공군의 낯선 전술에 말려들어 애를 먹었다. 결국 대응을 포기하고 최대한 접촉을 차단하기에 전념했다. 평양 철수를 시작했을 때부터 37도선에 도착할 때까지 유엔군의 후퇴 속도가 공산군의 추격 속도보다 빨랐을 정도였다.

그래서 인천항 철수도 이미 12월 7일부터 이따금 이루어지고 있던 상태였다. 서울 포기가 결정되고 흥남 철수에 동원된 수송선들이 대거 투입돼 1월 5일까지 철수 작전이 펼쳐졌다.

1950년 12월 29일 인천항을 통해 철수 중인 미군. 철수 완료 후 항구 파괴 여부를 놓고 고민을 하기도 했다. [www.ibiblio.org]

1950년 12월 29일 인천항을 통해 철수 중인 미군. 철수 완료 후 항구 파괴 여부를 놓고 고민을 하기도 했다. [www.ibiblio.org]

이것은 6·25전쟁 중에 있었던 마지막 해상 철수였다. 그런데 이 세 번의 작전 중 인천 철수는 같은 기간 중 이북에서 있었던 두 번의 철수와 비교하여 두드러진 차이점이 있다. 바로 항구를 온전하게 놔둔 체 떠났다는 사실이다.

사실 미 8군 사령관 월턴 워커는 철수 완료 후 인천항 폭파 여부를 놓고 고민을 했다. 하지만 참모진이 반대했고 그런 와중에 워커가 교통사고로 순직하면서 관련 논의가 중단되었다.

이처럼 진남포항과 흥남항의 파괴되었지만, 인천항이 살아남은 것은 많은 의미를 내포한다. 전사에 이와 관련한 이야기는 없지만, 북진 실패 후 향후 전쟁의 진행과 관련한 유엔군, 엄밀히 말하면 미군의 의지가 어떤 것인지 추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53년 인천항에서 화물을 하역하는 모습. 인천항은 재탈환 후 중요한 물류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미 해군]

1953년 인천항에서 화물을 하역하는 모습. 인천항은 재탈환 후 중요한 물류 거점으로 사용되었다. [미 해군]

미군은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하여 더는 자기 생각대로 전개될 수 없음을 깨닫고 현 수준에서 전쟁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래서 진남포와 흥남에서 철수할 때는 이곳을 다시 점령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상태였다. 그렇지 않고서 전략 시설물인 항구를 그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할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렵다.

반면 인천은 달랐다. 일단 내주지만 서울로 향하는 가장 가까운 해상 관문인 이곳을 반드시 되찾겠다는 확고한 의지가 있었던 것이었다. 실제로 1951년 3월에 서울을 재수복한 후 인천항은 아군의 중요한 물류 거점으로 재가동했다.

결론적으로 인천항의 보존은 미국이 중공군의 참전 이후 38도선 일대에서 전쟁을 멈추기로 결심하였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1953년이 되었을 때 군사적으로만 보자면 아군이 북진을 재개할 수 있는 충분한 여력이 있었다.

하지만 1950년 겨울에 미국이 휴전하기로 결심한 이상 상황이 바뀌지는 않았고 그 상태에서 총성이 멈추었다. 그렇게 통일의 꿈은 사라져서 갔고 남북의 대치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남도현 군사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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