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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어떻게 가나요" 경찰서 앞 서성이던 러 여성의 사연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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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8일 오후 10시. 서울 광진구 화양지구대 앞을 백인 여성이 서성였다. 지구대를 힐끔거리며 1시간 가량이 흘렀다. 지난해 12월부터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유학 생활 중인 러시아 국적의 S씨(20)다.

사연 묻자…“코로나에 아버지 위독”

경찰이 들어오라고 문을 먼저 열어줬지만, S씨는 골목 쪽으로 달아났다. 광진경찰서 화양지구대 정미영 경사가 그를 쫓아 나갔다. 정 경사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S씨가 입을 열었다. “한강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지구대 인근을 배회한 행동과 한강 위치를 묻는 말을 들은 정 경사는 극단적 선택을 의심했다. S씨는 경찰에 사연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이날 오후 러시아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건너편 어머니는 “아버지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했다. 러시아는 일일 확진자가 1만명이 넘고, 5일까지 423만명이 확진 판정을 받았다. S씨는 러시아에 입국해도 자가격리를 해야 해 아버지를 보러 갈 수도 없었다.

“할머니도, 동생도 코로나 걸려”

아버지 소식을 들은 그는 무작정 집을 나왔다고 한다. S씨는 “순간적으로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안 좋은 생각을 했다”며 “러시아에 있는 할머니와 동생도 현재 코로나19에 걸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어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고 했다. 이어 “러시아에서 경찰은 아주 무서운 이미지라 차마 경찰서에 들어가지를 못 했다”고 설명했다.

3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에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한 시민들이 거리를 걷고 있다. AFP=연합뉴스

3일(현지시간) 러시아 모스크바에 마스크와 장갑을 착용한 시민들이 거리를 걷고 있다. AFP=연합뉴스

S씨는 현재 코로나19로 입원해 있는 할머니와 어린 시절을 주로 보냈다고 한다. 그의 할머니는 한국에서 태어나 10년 넘게 살았던 러시아인이다. 그 영향으로 S씨도 할머니에게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유학을 꿈꿔왔다.

한국 생활서 어려움·외로움도

그는 최근 한국에서 몇 차례 사건을 겪어 힘들었다고도 토로했다. 밤에 길거리를 걷던 중 술을 마신 남성이 접근해 손을 잡으면서 “나와 모텔에 가자. 돈을 주겠다”고 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 편의점에서 갑자기 몸에 손을 대는 중년 남성도 있었다. S씨는 “고등학교 때 아르바이트한 돈을 모아 한국에 왔고,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오해를 받아 화가 난다”면서도 “한국 사람이 모두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고 했다.

그는 한국에 들어온 지 넉달이 지났지만 코로나19로 학교 수업이 비대면으로 진행돼 친구를 사귈 기회도 거의 없었다. 학교에 가야 다른 유학생이나 한국 학생과의 친분을 쌓을 수 있는데, 기회 자체가 사라진 것이다. S씨는 “또래 친구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경찰 언니들과 친구, 정말 고마워”

S씨가 4일 서울 광진경찰서 화양지구대 이다영 순경과 나눈 카카오톡 대화 일부. [S씨 제공]

S씨가 4일 서울 광진경찰서 화양지구대 이다영 순경과 나눈 카카오톡 대화 일부. [S씨 제공]

S씨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화양지구대 정미영 경사와 이다영 순경이 친구가 돼주기로 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이들과 문자나 카카오톡을 주고받고 있다. S씨는 길에서 모르는 사람이 갑자기 몸을 만지거나 손을 잡는 것도 범죄라는 사실을 정 경사에게 듣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이야기하는 내내 그는 “미영 언니와 다영 언니한테 정말로 감사하다”는 말을 수차례 반복했다.

정진호 기자 jeong.jin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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