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수사권 남긴다더니 침묵…尹사퇴 결심한 또다른 이유"

중앙일보

입력 2021.03.06 05:00

업데이트 2021.03.06 09:01

윤석열 전 검찰총장이 전격 사퇴한 데엔 여권에서 추진하는 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검수완박) 움직임에 대한 문재인 대통령의 침묵도 적잖은 영향을 줬다는 분석이 5일 법조계 안팎에서 나왔다. 윤 전 총장이 사퇴 시점을 전후로 “검찰총장에 임명될 땐 문 대통령이 ‘검찰에 중요 범죄에 대한 수사권은 남기는 것까지만 하겠다’는 취지로 말했다”고 토로했다는 게 복수의 법조계 인사들의 전언이다.

전격적으로 사의를 표명한 윤석열 검찰총장이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청사를 나서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윤 총장의 사의를 한 시간여 만에 즉각 수용했다. 연합뉴스

전격적으로 사의를 표명한 윤석열 검찰총장이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대검찰청 청사를 나서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윤 총장의 사의를 한 시간여 만에 즉각 수용했다. 연합뉴스

실제 문 대통령은 지난해 12월 15일 국무회의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숙원이었던 권력기관 개혁의 제도화가 드디어 완성됐다”고 선언했다. 닷새 전 국회를 통과한 개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을 두고서 한 말이다. 이 법은 공수처장 후보 추천 과정에서 야당의 비토(veto·거부)권을 삭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날 국무회의에선 개정 국가정보원법·경찰법 공포안도 올라왔다. 해당 법안은 며칠 뒤 관보에 게재되면서 공포됐다. 국정원의 대공수사권을 경찰에 이관하고 경찰에 국가수사본부를 신설하는 게 골자였다.

문 대통령은 지난해 1월 개정된 검찰청법·형사소송법에 따라 검찰의 수사지휘권을 폐지하고 경찰에 수사종결권을 부여하는 검·경 수사권 조정이 시행된 올해 초에도 “마침내 해냈다”며 새 제도의 안착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지난 1월 11일 신년사에서 권력기관 개편 등을 성과로 들며 “오랜 기간 형성된 제도와 관행을 바꾸는 일인 만큼, 다양한 이해관계자들과 긴밀히 소통하고 협력해 개혁된 제도를 안착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장경태·황운하·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왼쪽부터)이 지난달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중대범죄수사청법 발의 기자회견 후 취재진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이 법안은 검찰은 기존의 6대 범죄 등 주요범죄 관련 수사권을 중대범죄수사청에 이관하고 기소와 공소만을 유지하게 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뉴스1

장경태·황운하·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왼쪽부터)이 지난달 9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중대범죄수사청법 발의 기자회견 후 취재진 질의에 답변하고 있다. 이 법안은 검찰은 기존의 6대 범죄 등 주요범죄 관련 수사권을 중대범죄수사청에 이관하고 기소와 공소만을 유지하게 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뉴스1

하지만 더불어민주당 내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윤 전 총장이 법무부의 징계 시도에서 벗어난 지난해 12월 24일 이후 새 수사권 개편 논의로 들끓기 시작했다. 성탄절이었던 12월 25일 긴급 최고위원회의를 소집한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당 검찰개혁특위 설치를 지시하고 수사·기소의 완전한 분리를 위한 ‘검찰개혁 시즌2’를 선언했다. 나흘 만에 김용민 민주당 의원 등이 검찰청 폐지 법안과 공소청(기소와 공소유지만 담당하는 기관) 설치 법안을 들고 나왔고, ‘타도 검찰’ 분위기가 여권을 휩쓸었다.

‘검수완박’은 그렇게 태어났다. 문 대통령이 “검찰에 대한 민주적 통제 수단”(지난해 12월 15일)이라고 정의했던 공수처는 아직 검사·수사관 채용도 마치지 못해 제 기능을 못 하고 있지만, 공수처가 통제하겠다는 검찰을 아예 무력화하겠다는 법안이 속속 발의됐다. 황운하 민주당 의원이 지난달 9일 발의한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법은 검찰의 수사권을 전부 중수청으로 이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법안들을 올해 상반기 안에 통과시키겠다는 로드맵도 공공연히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왼쪽)이 2019년 7월 25일 오전 청와대 본관 충무실에서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환담을 하기 위해 인왕실로 이동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왼쪽)이 2019년 7월 25일 오전 청와대 본관 충무실에서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수여한 뒤 환담을 하기 위해 인왕실로 이동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이후 청와대에서 속도조절론이 흘러나왔지만, 문 대통령의 발언을 두곤 각자 다른 전언을 내놨다.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은 “그런 의미(속도조절)의 표현을 하셨다”(지난달 24일 국회 운영위)고 했지만,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대통령 말씀으로 ‘속도조절’ 표현은 없었다”고 다른 소리를 했다. 정작 문 대통령은 검수완박 추진에 직접 반응을 내놓진 않았다. 윤 전 총장이 이달 들어 작심한 듯 언론 등에 중수청에 대한 비판을 쏟아낸 건 그 직후다. 그는 검수완박을 “부패를 완전히 판치게 하는 ‘부패완판’”(지난 3일 대구 방문)이라고 강하게 반발했고 지난 4일 사퇴했다.

이에 윤 총장 주변에선 “최근 민주당이 추진하는 수사권 개편 움직임이 인사권자의 뜻과는 무관하게 흘러가는 걸 보곤 사퇴를 결심한 것”이란 말이 나왔다. 윤 전 총장 본인도 사퇴의 변(變)에서 “검찰에서 할 일은 여기까지”라고 말했다. 한 검찰 간부는 “이번 일은 검찰 존립 자체의 문제”라며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현 여권에 배신감을 느끼는 검찰 구성원이 많다”고 전했다.

하준호 기자 ha.junho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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