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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박정호의 문화난장

비운의 화가 진환, 나는 소로소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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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박정호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소와 아이들을 집중적으로 그린 화가 진환의 '날개 달린 소와 소년'(1940년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소와 아이들을 집중적으로 그린 화가 진환의 '날개 달린 소와 소년'(1940년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박정호 논설위원

박정호 논설위원

진환(1913~51)이란 비운의 화가가 있었다. 시쳇말로 억세게 운이 없었다. 죽음 자체가 허망하기만 했다.

이중섭 그림에 영향 미쳐 #‘조선인=소’ 일관된 화풍 #일제강점기 예술혼 살려 #타계 70년 재평가 움직임

1951년 1·4 후퇴 때다. 서울 홍익대 미술학부 초대 교수로 있던 그는 고향인 전북 고창으로 피난길에 나섰다. 고생고생 고향 산자락에 도착한 그는 갑자기 날아온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전쟁 전 교장으로 재직한 무장농업중학교(현재 영선중고교)에서 가르쳤던 제자가 그를 빨치산으로 오인하고 방아쇠를 당겼던 것이다. 서른여덟, 창창한 나이였다. 동족상잔의 쓰디쓴 비극이다.

어린 시절 진환의 두 살 아래 고향 친구가 미당 서정주(1915~2000)였다. 미당은 진환의 덧없는 최후를 애달파했다. ‘진환을 추모한다’는 글을 썼다.

‘유난히도 시골 소의 여러 모습들을 그리기를 즐겨 매양 그걸 그리며 미소 짓고 있던 그대였으니, 죽음도 그 유순키만한 시골 소가 어느 때 문득 뜻하지 않게 도살되는 듯한 그런 죽음을 골라서 택했던 것인가?’

화가 진환의 ‘소’ (1940년대). 일제 말기 한국의 많은 화가들은 우직한 소를 그리며 나라 잃은 아픔을 형상화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화가 진환의 ‘소’ (1940년대). 일제 말기 한국의 많은 화가들은 우직한 소를 그리며 나라 잃은 아픔을 형상화했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진환의 '연기와 소'(1940년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진환의 '연기와 소'(1940년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잊혀진 화가’ 진환과 처음 마주쳤다. 요즘 전시 중인 ‘미술이 문학을 만났을 때’(5월 30일까지)에서다. 미당이 추모했듯 진환의 소 그림 다섯 점이 나왔다. ‘소의 작가’ 하면 흔히 이중섭(1916~56)을 떠올리지만 진환 또한 그에 못지않게, 아니 그보다 더 소에 집중한 화가였다. 소가 또 다른 자아(alter ego)인 것마냥 붙들고 살았다.

예로 ‘날개 달린 소와 소년’을 보자. 하늘을 나는 말 페가수스처럼 진환은 소에게 커다란 날개를 달아주었다. 날개를 치켜세운 소는 머리를 들어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일제의 속박을 벗어나려는 갈망이 아닐까 싶다. 그 오른쪽으론 소등에 올라탄 소년이 보인다. 한데 얼굴은 밝지 않다. 목가적 풍경이 전혀 아니다. 암울한 시대 탓일 것이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작품이다.

또 다른 그림 ‘소’는 는 제법 역동적이다. 쭉쭉 그어 내린 필선이 살아 있다. 깊은 상념에 빠진 듯, 무쇠처럼 단단한 뿔을 지닌 소가 지그시 눈을 감고 있다. 반면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우기 8’(전시에는 나오지 않음)은 꽤 정겹다. 어미 코에 얼굴을 비비는 어린 송아지의 모습이 풋풋하기만 하다.

화가 진환(왼쪽)과 친구 이쾌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화가 진환(왼쪽)과 친구 이쾌대.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진환은 왜 소에 매료됐을까. 그가 남긴 ‘소의 일기’에서 힌트를 엿볼 수 있다. ‘소는 우두커니 서 있다. 힘차고 온순한 맵씨다. 몸뚱어리는 비바람에 씻기어 바위와 같이-. 순한 눈방울 힘찬 두 뿔 조용한 동작, 꼬리는 비룡(飛龍)처럼 꿈을 싣고 아름답고 인동(忍冬) 넝쿨처럼 엉클어진 목덜미의 주름살은 현실의 생활에 대한 기록이었다.’

진환뿐만이 아니었다. 일제 말기 우리네 화가들은 소를 즐겨 인용했다. 고단한 세상을 딛고 일어서는 에너지를 소에서 찾았다. 시대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자신들의 불우한 처지를 소에 투영했다.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근대미술팀장은 “1930년대 일본에 유학한 미술학도들의 최대 친목단체가 백우회(白牛會)일 만큼 소는 조선인의 상징이었다”며 “내선일체를 강요한 일제는 결국 백우회라는 명칭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할 정도였다”고 말했다.

2021년 신축년에 만난 진환의 소 그림은 더욱 반갑다. 잃어버린 화가를 되찾고 한국미술사의 공백을 채운다는 의미가 크다. 마침 올해는 진환의 타계 70주기가 되는 해다. 지난해에는 『진환 평전』도 처음 발간됐다. 근대미술연구가 황정수는 이 책에서 “이중섭이 그린 소 그림이 1950년대의 것들인 반면 진환은 이미 1942~43년에 ‘우기 8’ 등을 그렸다”며 “만일 두 사람 사이에 영향 관계가 있다면 이중섭이 진환의 영향을 받았음이 자명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이번 전시는 1930~40년대의 문화동네를 집중적으로 살핀다. 구본웅과 이상, 이중섭과 구상, 정현웅과 백석, 이태준과 김용준 등등, 일제강점기 화가와 문인의 이인삼각(二人三脚) 행보가 흥미롭다. 척박한 식민지 조선에 예술의 혼을 심으려는 그들의 우정과 열정이 되살렸다. 미술과 문학의 즐거운 동거가 되레 새롭기만 하다. 문학 따로, 미술 따로, 영화 따로, 각자도생의 오늘날 문화판에서 보기 어려운 그 무엇을 되비추는 거울이 된다.

코로나19 비대면 사회에서 우리가 우울해 하는 것도 결국 그런 관계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 아닐까. 앞으로 기회가 되면 1910~20년대를 조명한 자리도 마련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