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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포개시장의 운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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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위성욱 기자 중앙일보 부산총국장
위성욱 부산총국장

위성욱 부산총국장

수십 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다. 어린 시절 우연히 지나가다 본 부산 ‘구포개시장’이 그런 경우다. 초점 없는 눈으로 좁은 철창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던 개들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그 모습이 생생히 기억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생겨난 구포개시장은 2019년 7월 1일 문을 닫으면서 60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하지만 이곳의 활용 방안을 놓고 최근 또다시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부산 북구는 다음 달 중순부터 구포개시장을 본격적으로 철거하고 이 부지 995㎡에 4층 규모의 ‘서부산 동물복지센터’(이하 동물센터)를 짓기로 했다. 사실상 홀로코스트(대학살)가 이뤄졌던 공간에 동물 입양 카페와 동물병원, 동물 보호시설 등을 지어 이곳의 아픈 기억을 치유하겠다는 의미다.

동물센터 건립은 구포개시장이 폐업하면서 시와 자치단체·상인 등이 합의한 사항이었다. 하지만 최근 구포 주민이 동물 대신 사람을 위한 편의시설이 먼저라며 동물센터 건립을 반대하고 나서면서 다시 논란이 되고 있다. 구포 주민자치회는 구포개시장 부지 인근에 ‘평당 4000만원에 수용한 땅에 동물복지보다 주민 쉼터가 먼저’라는 현수막을 내걸기도 했다.

2019년 부산 북구 구포시장 내 가축시장(개시장)에서 개들이 갇혀 있던 철장이 철거되고 있다. [연합뉴스]

2019년 부산 북구 구포시장 내 가축시장(개시장)에서 개들이 갇혀 있던 철장이 철거되고 있다. [연합뉴스]

구의회도 ‘주민 의견이 최우선’이라며 동물센터 건립에 제동을 걸었다. 부지 용도 결정은 구의회 동의사항이다. 북구의회 김명석 의장은 “동물센터 건립 결정 때 정작 지역 주민의 의견은 반영되지 않았다”며 “북구청이 주민 의견을 반영한 절충안을 가져오지 않으면 부지 용도 결정에 동의해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근 주민은 동물센터 대신 공원이나 주민 커뮤니티 공간이 조성되기를 바라고 있다.

반면 구포개시장 폐업을 끌어냈던 동물보호단체는 반발하고 있다. 심인섭 라이프 대표는 “동물센터는 동물 학대의 온상이던 구포개시장이 동물 복지를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며 “구의회가 주민을 설득하기는커녕 ‘주민 의견’을 내세워 동물센터 건립을 반대하는 태도는 갈등을 부추길 뿐이다”고 말했다.

구포개시장이 문을 닫은 건 심 대표처럼 누군가는 잘못된 것을 인식하고 그것을 바꾸려고 노력해서다. 여기에 자신의 생계를 그만둔 상인들의 결단과 변화된 시민들의 의식을 부산시가 수용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60년이라는 긴 시간을 끈질기게 연명해왔던 공간이 무너진 건 이런 힘들이 모여서다.

그 무너진 자리에 무엇을 세울지 합리적인 방안을 찾는 것은 모두가 고민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 고민 속에 6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희생의 대상이 되었던 개들과 그들을 바라보며 또 다른 상처를 입었던 사람들이 함께 치유되는 방안도 빠트려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위성욱 부산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