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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딜쿠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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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박진석 기자 중앙일보 기획취재담당
박진석 사회에디터

박진석 사회에디터

서울은 산책로의 도시다. 산과 언덕, 강과 개천들을 품고 있는 덕택에 걷기의 즐거움을 만끽할 만한 곳들이 많다. 한때 애용했던 도보 길은 강북삼성병원에서 서울시교육청을 지나 성곽길을 타고 오르는 코스였다. 완만한 등고선을 몸으로 느끼며 인왕산 입구에 도착하면 거기서 고도를 더 올려도 좋았고,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서촌으로 빠져나오거나 부암동까지 내쳐 걸어도 좋았다.

그 길의 초입에 100세에 가까운 벽돌 양옥집 두 채가 있다. 먼저 마주쳤던 건 단층집인 홍난파 가옥이다. 1930년생인 이 집은 일찌감치 리모델링돼 기념관과 작은 공연장으로 애용된다. 거기서 불과 200m 떨어진 곳에 한창때 한가락 했을 것 같은 이층집이 있었다. 뼈대는 여전히 볼 만했지만 꾀죄죄하고 지저분한 외관은 폐가를 방불케 했다. 널브러진 빨래와 음산한 인기척이 더해진 탓에 서둘러 발길을 돌리곤 했다.

그게 한국 근대사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 ‘딜쿠샤’(Dilkusha)였다는 걸 안 건 뒷 날의 일이다. 세상만사가 그렇듯 그 집에도 찬란한 시작이 있었다. 집을 지은 이는 1919년 3월 3·1운동을 세계에 타전했던 AP통신 기자 앨버트 테일러(1875~1948)다. 딜쿠샤는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다. 테일러는 1923년 이 집을 세운 뒤 1942년 일제에 의해 국외 추방당할 때까지 거주했다.

1963년 국가가 소유자가 됐지만, 문화재 관리 개념을 기대하긴 어렵던 시절이었다. 갈 곳 없는 이들이 무단 입주해 살면서 건물은 훼손됐다. 2016년 서울시가 딜쿠샤를 복원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그 집에는 무려 12가구가 거주하고 있었다. 당국은 설득과 소송을 병행하면서 몇 년에 걸쳐 이들을 순차적으로 내보냈다.

102번째 3·1절이었던 지난 1일 딜쿠샤는 세월의 때를 말끔히 벗겨내고 옛 모습을 되찾았다. 테일러 부부의 유품 1000여점을 기증해 재개관의 일등공신이 된 손녀 제니퍼 테일러는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쓴 미국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이 기억해 준다면 더 바랄 게 없다”고 소회를 밝혔다.

봄빛이 완연하다. 식사 후 딜쿠샤까지 가벼운 산책을 하는 것도 좋을 듯싶다. 기미년 3월의 그들에 대한 고마움을 가슴 한편에 담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다.

박진석 사회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