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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기고

이야기는 관계를 변화시키고, 관계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중앙일보

입력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대로 산다고 한다. 행복한 사람은 자신에 대해 긍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반면 불행한 사람은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이야기만 한다. 그런데 이런 삶의 이야기는 혼자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는 관계 안에서 만들어진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가 긍정적일 때는 행복을 말하지만 관계가 어긋나거나 갈등을 겪게 되면 괴롭고 힘든 이야기를 하게 된다. 결국 내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는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이 설명해 주는 것이다.

위즈덤하우스에서 나온 〈황선미 선생님이 들려주는 관계 이야기〉 시리즈는 이런 ‘관계적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지옥으로 가기 전에』의 장루이는 엄마와의 관계에서 휘둘리는 자신을 이야기한다. 『나에게 없는 딱 세 가지』의 미주는 가족들의 편애가 있는 형제관계에서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내가 김소연진아일 동안』의 진아는 ‘착한 아이’라고 굴레를 씌우는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얘기한다. 『할머니와 수상한 그림자』의 기훈이는 어른들과의 관계에서 너무 일찍 성숙해버린 애어른이고 『건방진 장루이와 68일』의 윤기는 관계에서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숨어버리는 아이이다.

그러나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이것은 한 사람과의 관계를 끝장내고 다른 사람과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동일한 관계라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정의될 수 있다. 장루이, 미주, 진아, 기훈이, 윤기는 관계를 다르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리하여 자신을 다르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휘둘리는 나’가 아닌 ‘저항하는 나’, ‘부족한 나’가 아닌 ‘채워줄 수 있는 나’, ‘힘들다고 말할 수 없는 나’에서 ‘털어놓을 수 있는 나’, ‘애어른’에서 ‘아이다운 아이’, ‘존재감 없는 아이’에서 ‘의지가 되는 친구’로 변화된 것이다.

황선미 작가는 아이들의 정체성 변화의 과정을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글에서 밝힌 바와 같이 이야기 속 인물들에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더 큰 공감을 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작가는 이야기 속 아이들을 특별한 애정을 가지고 어루만져준다.

하지만 황선미 작가에게는 영악함도 있다. 그녀는 5편의 이야기가 ‘관계’라는 전체 주제를 두고 서로 연결되는 피카레스크식 구성을 취했다. 1권이 2017년에 출간되었고 5권이 2021년에 출간되었다. 그럼에도 작가는 5년에 걸쳐 출간된 이야기들을 동일한 시간대에 벌어진 사건들로 엮어 냈다. 모든 이야기들은 2017년에 일어난 사건들임과 동시 2021년에 일어난 사건들이기도 하다. 아니, 어느 해에 일어난 일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이러한 구성은 우리의 관계가 각각이 독립적인 양자관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체계를 이루며 서로 그물처럼 얽혀 있음을 얘기한다.

또한 관계의 문제라는 것이 한정된 시간과 공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시공간을 넘나들며 영향을 주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이 때문에 5권의 책 중에서 어느 것을 먼저 읽어도 상관없다. 각 권에서는 다른 권의 이야기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때로는 지나간 사건에 대한 재해석으로, 때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의 암시나 복선처럼 다가온다.

어느 권에서도 모든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아이들은 문제가 되는 관계와 사람들에 대해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게다가 권말에 수록되어 있는 이보연 아동심리 전문가의 이야기는 아이들의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우리가 일상에서 이렇게까지 진지하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고 또 읽을 수 있을까?

게다가 다섯 개의 이야기 중 어느 것도 섣부른 결말로 끝나지 않는다. 그래서 책의 마지막 부분을 읽으면서도 앞으로 몇 페이지가 더 남아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결말은 실제로 우리의 문제가 쉽게 해결되고 한 번에 마무리되지 않는 것과 같다. 진짜 이야기의 끝은 책을 읽는 아이들이 만든다. 책 속의 아이들이 슬그머니 내어진 이야기 자리에 독자인 아이들은 자기 이야기를 연결 짓고 새로운 이야기를 다시 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야기는 관계를 변화시키고, 관계는 아이들을 변화시킨다. 이것이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 김민화 신한대학교 유아교육과 교수 겸 아동발달심리 전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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