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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고현곤 칼럼

“나는 경고했다”는 비겁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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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고현곤 기자 중앙일보 편집인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

1997년 11월 외환위기가 터지자 누군가는 책임져야 했다. 경제관료 상당수가 옷을 벗었다. 그 와중에 책임을 피한 경우도 있었다. 한국은행이 대표적이다. 당시 감사원은 “한은이 97년 3~11월 23차례나 정부에 심각한 외환 사정을 보고했다”고 밝혔다. 한은은 소임을 다한 것일까. 한은은 통화정책뿐 아니라 은행과 2금융권(보험·증권 제외)을 관리 감독하는 역할을 맡았다. 외환위기가 은행·종합금융사 부실로 빚어진 만큼 한은은 책임당사자였다. 보고했다고 책임을 면하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절묘한 프레임이 짜였다. 재정경제원은 외환위기 주범으로 몰렸다. 한은은 외환위기를 수없이 경고했지만, 재경원으로부터 무시당한 피해자로 자리매김했다. 어느새 동정과 위로가 한은에 쏟아졌다. 무서운 ‘프레임의 힘’이다.

환란 때 한은 “경고했다”로 면피 #이주열, 이번도 돈 풀며 과열 걱정 #홍남기 ‘반대→백기’도 면피 행보 #대통령, 버블·재정책임 뒤집어쓸판

97년, 한은에서 검사권(은행감독원)을 떼어내는 금융개혁이 진행됐다. 한은 간부들은 반대 로비를 하느라 국회와 언론사를 찾아다니기에 바빴다. 고(故) 제정구 의원의 얘기다. “어느 날 밤 귀갓길에 한은 간부가 도와달라며 기다리고 있어 ‘나라가 부도나게 생겼는데 이럴 땐가’라고 통탄한 일이 있다.” 한은 직원들은 구제금융 직전까지 머리띠를 두르고 농성을 벌였다. 그랬던 한은이 “나는 경고했다” 한 방으로 외환위기 책임을 면했다. 공무원 중에도 “나는 경고했다” “나는 대통령에게 직보했다”며 책임을 피해 간 경우가 적지 않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인터뷰에서 “나는 경제 걱정을 했는데, 경제관료들이 별문제 없다고 말했다”고 외환위기 책임을 관료들에게 돌렸다. “나는 경고했다”는 두고두고 나쁜 선례로 남았다.

최근 저금리가 이어지면서 부동산·주식 등 자산가치가 급등했다. 실물과 금융의 괴리가 너무 커졌다. 버블이 분명하다. 한은은 예나 지금이나 노련한 줄타기를 한다. 새해 들어 이주열 한은 총재는 “주가 상승 속도가 대단히 빠르다. 작은 충격에도 흔들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빚투’(빚내서 투자)에 대해 “감내하기 어려울 정도의 손실을 유발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버블이냐 아니냐는 사전에 판단하기 어렵다”고 단서를 달았다. 자산가치 급등은 정부의 정책 실패에 큰 원인이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돈의 가치가 떨어지고, 시중에 유동성이 넘치는 게 문제다. 저금리를 유지해 온 한은은 이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구경꾼이 아니라 당사자다. 외환위기 때 당사자였던 것처럼. 그런데도 이 총재는 ‘버블인지 아닌지 잘 모르겠으나 위험할 수 있으니 유념하라’고 하나 마나 한 관전평을 했다. ‘과열이 걱정스럽지만, 돈은 계속 풀겠다’는 앞뒤 안 맞는 고백을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 그럴듯하게 포장했다. 이 총재로선 “나는 경고했다”는 알리바이를 남긴 셈이다. 그러는 사이 버블은 계속 커졌다.

세계는 인플레이션 공포에 직면했다. 래리 서머스 하버드대 교수는 “(코로나) 부양책이 엄청난 인플레를 불러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인플레 우려로 미국 국채금리와 국제 유가는 이미 상승세를 탔다. 국내 대출금리도 심상치 않다.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지난주 “기준금리를 인상하지 않을 것”이라며 진화에 나섰지만, 시장은 살얼음판이다. 버블이 터지면? 이번에도 한은은 열심히 경고했는데, 귀담아듣지 않은 투자자들만 무지와 탐욕의 집단으로 몰릴 판이다.

한은의 절묘한 처세술을 공무원들도 배웠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며 어깃장을 놓다가 백기를 들었다. 여덟 차례나 그랬다. 이쯤 되면 정말 반대하는건지 의심스럽다. 반대도 상대방을 봐 가면서 한다. 문재인 대통령이 ‘으쌰으쌰 전 국민 위로금’과 ‘28조원짜리 가덕도 신공항’을 띄우자 홍 부총리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침묵한다. 지난해 사표 소동도 ‘잘 짜인 쇼’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나는 경고했다. 사표를 낼 정도로 고민했다”며 빠져나갈 구멍을 만든 것 아닌가. 페이스북에 반대 의견을 올리거나 공개석상에서 울먹이는 건 경제부총리로서 격에 맞지 않는다. 고도의 자기 정치인지 모르겠으나 그가 이끄는 조직을 비참하게 만든다. 후배들 보기에도 민망하다. 은성수 금융위원장도 비슷하다. “주식 공매도를 재개하겠다”고 했다가 여당 뜻에 따라 슬그머니 입장을 바꿨다. 아무튼 “나는 반대했다”는 비장의 카드를 확보했다.

정권 말,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자리는 지키고 싶고, 빠질 구멍은 만들어야겠고…. 넋 놓고 있다간 훗날 적폐로 몰릴 수 있다. 적폐의 끔찍한 운명을 이 정권 내내 지켜봤다. 어느 순간, 대통령 뜻도 뭉개고 필사적으로 보신과 면피에 나설 것이다. 요새 각 부처가 가덕도 신공항에 반대했다는 기록을 남기는 게 그런 현상인 듯하다. 본격화하면 레임덕이다. 그러고 보면 문 대통령만 눈치가 없다. 아랫사람들은 책임을 안 지려고 이 궁리 저 궁리 하는데, 문 대통령은 ‘코스피 3000’과 ‘으쌰으쌰 위로금’ ‘가덕도 신공항’을 동네방네 자랑했다. 버블이 터지거나 재정이 부실해지면 다들 “나는 경고했다”고 빠져나가고, 자칫 문 대통령이 ‘독박’을 쓰게 생겼다.

고현곤 논설주간 겸 신문제작총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