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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조강수 논설위원이 간다

예측 가능했던 사법부 인사, 진영 경쟁으로 변질됐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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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조강수
조강수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검찰·경찰 인사와 비슷해진 법원 인사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앞 도로변에 근조화환이 늘어서 있다. 일반 시민들이 ‘김명수 사퇴’‘사법부 각성’ 등의 문구를 적어 보냈다. 맨오른쪽에 하얀 국화에 빨간 장미로 십자가를 형상화한 고급 화환도 보인다. 인근 주민은 "그만 내려놓고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라는 뜻으로 마련했다"고 말했다. 조강수 기자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앞 도로변에 근조화환이 늘어서 있다. 일반 시민들이 ‘김명수 사퇴’‘사법부 각성’ 등의 문구를 적어 보냈다. 맨오른쪽에 하얀 국화에 빨간 장미로 십자가를 형상화한 고급 화환도 보인다. 인근 주민은 "그만 내려놓고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라는 뜻으로 마련했다"고 말했다. 조강수 기자

지난달 순차적으로 단행된 법원과 검찰의 정기인사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산 권력 수사 견제’와 ‘우리 편 유임·영전’으로 압축된다. 김명수 대법원장이 먼저 이른바 ‘사법농단’ 사건 재판부와 ‘산 권력’ 사건 재판부를 특별히 유임시키는 인사를 했다. 이어 박범계 법무장관도 이성윤 서울중앙지검장과 윤석열 검찰총장 징계에 앞장섰던 대검 간부들을 유임하는 인사를 강행, 윤석열 포위 구도를 유지했다. 강고화된 ‘내편 중용, 네편 유배’ 코드 인사를 통해 이미 기소된 사건의 재판에선 원하는 결과를 도출하고, 현재 예봉이 꺾이지 않은 검찰 수사는 계속 견제하려는 ‘원대한(?) 계획’으로 읽혔다. 그나마 신현수 청와대 민정수석의 사표 파동 속에 검찰 인사는 소폭에 그쳤고 산 권력 수사팀도 생존했다. 오히려 법관 인사가 대법원장의 거짓말, 탄핵 거래보다 더 나쁘다는 소리까지 나온다. 왜 그런지 인사 배경과 문제점을 추적해봤다.

중앙지법 인사가 ‘코드’ 축약판 #적폐·권력 재판부 ‘내편’ 유임 #이전엔 대법원장 인사관여 ‘0’ #“판사도 이젠 정치해야” 자조

지난달 26일 서울 서초동 대법원청사 앞. 100여개의 사법부 근조 화환이 도로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곳에서 마주친 지인 검사는 “윤석열 검찰총장이 반(反)윤 참모들에 의해 대검에 갇힌 것처럼 대법원장도 시민들이 보낸 근조화환에 갇힌 형국”이라고 말했다.

일단 인사혁신처 기획조정 담당자에게 공무원 인사 원칙이 뭔지부터 물었다. “국가공무원법 1조에 나와 있다. 인사행정의 근본 기준은 공정성이다. 40조에는 중앙부처 공무원 승진은 근무성적평정, 경력평정, 그 밖에 능력의 실증에 의하는 것(교육 성적 등)이라고 돼 있다. 능력주의, 실적주의다.”

이 기준에 법원 인사를 대비해보니 격차가 크다. 특정 사건 담당 판사들의 선택적 유임과 표적 인사가 난무했다. ‘요직 싹쓸이 코드 인사’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인사의 모순은 전국 최대 규모의 서울중앙지법에 응축돼 있다. 중앙지법원장에 성지용 춘천지법원장이, 형사수석부장에 고연금 부장판사가 발탁됐다. 둘 다 김 대법원장이 초대 회장을 지낸 국제인권법연구회 회원이며 2017년 ‘판사 블랙리스트 의혹’ 진상조사단에 참여했다.

법관 사무 분담 및 평정 등을 관장하는 민사1 수석부장에 임명된 송경근 부장판사는 2018년 사법행정권 남용 사태 당시 “법원이 (양승태 대법원) 수사에 반대하면 국민 분노에 기름을 붓는 것”이라며 검찰 수사를 주장했다. 인사 설명 자료를 찾아보니 ‘민사1 수석 자리는 고법 부장판사 보직인데 이번에 인사 규칙을 개정, 지법 부장판사로 범위를 넓혔다’고 돼 있다. 송 부장을 위해 콕 집어서 개정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송 부장이 주도해 서울중앙지법 사무분담위원회가 내놓은 결정이 형사합의 36부 윤종섭 부장판사와 형사합의 21부 김미리 부장판사의 유임이다. 이로써 ‘사법 농단’ 사건 중 임종헌·이민걸·이규진 전 판사 사건을 맡은 윤종섭 부장판사는 6년째, 배석 판사 2명은 각각 4년, 5년째 근무하게 됐다. 판사들 사이에선 대법관 임기 6년에 빗대 ‘윤종섭 대법관’이라고 부른단다.

“판사 생활을 오래 했지만 6년 유임은 처음 본다. 경희대 출신으로 학벌에서는 법원 내 소수자다. 그래서 그런 건지, 천성이 그런 건지 속을 알 수 없는 판사다. 그런데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기피 신청당한 걸 보면 유죄를 선고할 거라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준 것 같다. 그 점에선 재판 잘못한 것이고.”(A 고법 판사)

조국 전 장관의 입시 비리와 유재수 감찰 무마, 울산시장 선거 개입 등을 재판하는 김미리 부장판사도 4년째 서울중앙지법에 유임됐다. 울산시장 선거개입 재판은 기소 1년이 지났지만 개점휴업 상태다.

정반대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사건 담당 재판부 3명은 근무기한을 채웠다는 이유로 전원 교체됐다. 형사합의35부 박남천 부장판사는 서울동부지법으로, 배석 판사 2명도 자리를 옮겼다. 피고인 측에선 “박 판사는 증거를 꼼꼼하게 따지는 스타일”이라며 “거의 90%는 무죄일 것으로 예견했는데 재판장이 교체됐다”고 반응했다. 윤 판사와 박 판사의 차이는 자기 재판을 한쪽 방향의 심증을 갖고 진행했느냐 아니냐 외에는 찾기 어렵다고도 했다.

법원 인사에 정통한 전직 고위 법관을 만났더니 예전 인사 절차를 설명해준다. “매년 2월 정기인사를 위해 1년 전부터 준비한다. 먼저 인사 수요부터 계산해 신규 임용 플랜을 짠다. 인사 대상지를 서울·수도권, 중부권, 지방권 셋으로 나눠 수급 인원을 정한다. 지방으로 내려보낼 때와 서울로 다시 올릴 때마다 법관 경력순으로 할지, 성적순으로 할지, 여성에게 어드밴티지를 줄지, 부부를 같은 법원에 근무하게 할 건지 등을 끊임없이 검토하며 원칙을 좁혀간다. 1년 내내 원칙만 정했고 특정인 이름은 한 번도 안 나왔다. 막판께 인사가안을 갖고 왔는데 그때 1000명쯤의 판사 이름이 보였다. 그런데 다 후배들이라 아는 판사가 없더라. 까만 건 글자고 하얀 건 종이야. 개입할 틈도 없다. 사법연수원 성적이 승진 순서를 결정했으니까.”

법원장급 이상은 어떤가.
“이전엔 대법원장의 인사권 행사라는 게 없었다. ‘0’(零)이었다. 수십년간 내려온 전통이다. 법원장급 이상 인사는 대법원장이 관여하지만 최종영·양승태 전 대법원장 등이 누굴 법원장 시키라고 했다는 얘긴 들은 적이 없다.”
중앙지법 6년·4년 근무를 본 적 있나.
“처음 본다. 차라리 룰(원칙)을 만들지. 예측 가능하던 사법부 인사가 수사기관인 검찰·경찰 인사처럼 누군가를 제치고 올라가는 경쟁체제가 됐다.”

‘미스터 쓴소리’로 불렸던 김태규 전 부산지법 부장판사가 보는 요즘 인사 기준과 방식은 뭘까.

“대법원장과의 친소관계가 중요하다. 오로지 진영만 본다. 먼 지방에 있어도 내편이면 끌어올린다. 이전과 제일 다른 게 각종 위원회다. 모든 인사에 위원회를 끌어넣었다. 대법관 추천위, 헌법재판관 추천위, 법원장 추천위, 사무분담위원회 등이다. 단점은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제 법관들도 좋은 자리로 가려면 정치를 해야 한다. 법원이 정치판이 돼간다.”

법관들의 의견을 반영해 좋은 것 아닌가.
“아니다. 공정해 보이지만 이전의 인사 관행을 깨기 위한 트릭이다. 이전 방식은 다음 자리가 예견이 된다. 인사권자 입장에서는 원하는 사람을 원하는 곳에 심기가 어렵다. 슬그머니 다중의 의사라는 명분을 내세워 주류 세력인 인권법연구회 회원들이 3~4명씩 무리를 지어 각종 위원회를 장악하고 의사 결정하는 구조다. 이들의 선정 기준은 대법원장이 원하는 것과 일치한다. 특정 사안, 특정 재판이 특정 방향으로 나가게 할 힘이 있다.”
미스터 쓴소리로 불렸던 김태규 전 부장판사가 최근 출간한 책. '법복은 유니폼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김명수 사법부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국제인권법연구회 해체 등을 주장했다. 중앙포토

미스터 쓴소리로 불렸던 김태규 전 부장판사가 최근 출간한 책. '법복은 유니폼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김명수 사법부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국제인권법연구회 해체 등을 주장했다. 중앙포토

어떤 조직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개혁이고, 현재를 규정하는 것은 인사다. 특히 법과 정의의 보루인 사법부 인사는 어느 정권이 들어서든 공정하고 투명해야 한다. 인사가 한쪽으로 치우치면 판결도 기운다고 여긴다.

김명수 사법부는 ‘좋은 재판’을 모토로 내걸었다. 그러려면 ‘착한 인사, 공정한 인사’가 먼저다. 그게 없다면 불가능한 목표다.

88년 김용철 대법원장 사퇴시킨 2차 사법파동, 도화선도 법관 인사

박시환

박시환

이번 취재 과정에서 만난 법조인들은 이구동성으로 한 가지 과거 사건을 언급했다. 법관 인사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설명하면서다. 박시환(68·사법연수원 12기·사진) 전 대법관이 1985년 춘천지법 영월지원으로 좌천된 일이었다.

판사 출신의 중견 변호사는 “그해 인천지법 판사로 부임한 박 전 대법관은 반정부 시위로 재판에 넘겨진 학생 11명에게 무죄를 선고했다가 발령 6개월 만에 인사 불이익을 받았다”며 “곧바로 서태영 서울지법 판사가 법률신문에 ‘인사유감’이라는 글을 기고했고 그 역시 울산지원으로 좌천됐다”고 기억했다. 서슬 퍼렇던 독재 정권에서 벌어졌던 이른바 ‘법관 인사 파동’이다. 그는 “서 판사는 글에서 ‘장군을 일등병으로 보내는 인사’라고 질타했다”며 “즉결심판에서 무죄 썼다고 지방으로 인사 발령낸 것 하나로 그 난리가 났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해당 사건은 3년 뒤 2차 사법파동의 도화선이 됐다.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1988년 2월 소장판사 일부가 사법부 수뇌부의 개편을 주장하는 성명을 낸 데 이어 서울·부산 지역 소장 판사 430여명이 ‘법원 독립과 사법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서명에 참여했다. 박 전 대법관은 그해 6월 김종훈·강금실·한기택 등과 함께 ‘우리법 연구회’ 모임을 만들었다. 결국 김용철 대법원장이 사퇴했다. 2005년 참여정부에서 대법관이 된 그는 진보적 소수의견을 많이 내놨다.

현직 법원 간부는 “그때로부터 36년이 지난 지금 사법부 인사가 지나친 ‘코드 인사’ ‘방탄 인사’로 비판받고 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라며 “그것도 박 전 대법관이 창립한 우리법연구회 회장 출신인 김명수 대법원장이 타깃이 될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느냐”고 말했다.

조강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