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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살 현역 화가 박서보 “떠날 준비가 즐겁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0면

박서보 화백은 “죽음도 삶이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삶”이라고 말했다. 그가 앉은 자리 뒤로 최근에 심은 홍매화가 보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서보 화백은 “죽음도 삶이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삶”이라고 말했다. 그가 앉은 자리 뒤로 최근에 심은 홍매화가 보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단색화의 대가’ 박서보(90) 화백이 오는 17일부터 영국 최고의 갤러리로 꼽히는 화이트큐브에서 개인전을 연다. 런던 화이트큐브 전시는 2016년 이래 세 번째다. 앞서 2019년 9월엔 독일 노이스 랑엔파운데이션에서, 10월엔 프랑스 파리 페로탱 갤러리에서도 개인전을 열었다. 한국인으로는 처음 화이트큐브에서 개인전을 열어 ‘완판’ 기록을 낸 그가 세계 굴지의 갤러리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미술관 둘, 기념관 한 곳 준비 중 #예천에 시대별 대표작 120점 기증 #세계적 거장 춤토르에 설계 부탁 #구기동엔 드로잉·판화 등 단색화

지금은 서울 구기동에 지어질 박서보 단색화 미술관(종로구립), 경북 예천에 지어질 박서보 미술관, 서울 연희동 집에 마련될 박서보 기념관을 준비 중이다. 지난달 19일 서울 종로구와 함께 ‘미술관 건립을 위한 업무협약’을 맺었고 고향인 경북 예천 남산 한가운데 지어질 미술관은 훨씬 오래전부터 준비해왔다. 두 미술관 모두 박 화백의 기증 작품으로 조성된다.

최근 그는 스위스 출신의 세계적인 건축가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78)에게 설계를 의뢰하는 내용의 친필 편지와 도록 14권을 보냈다. 춤토르가 설계를 맡는다면 예천의 박서보 미술관은 전설 같은 화가와 건축가의 만남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구순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미술관을 준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박 화백을 만났다.

17일 개막하는 영국 런던 화이트큐브 전시에 선보일 박서보의 1973년 작품. [화이트큐브]

17일 개막하는 영국 런던 화이트큐브 전시에 선보일 박서보의 1973년 작품. [화이트큐브]

서울과 예천. 두 곳에 미술관 건립을 준비 중이다.
“내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 가야겠다고 생각해왔다. 많은 사람이 그림을 소유하지 않고도 예술을 맘껏 향유할 수 있게 하고 싶다.”
기념 공간이 많은 것은 아닐까.
“작품이 꽤 많다. 2009년 심근경색으로 쓰러지기 전까지 매일 하루 14시간씩 작업했다. 대형 작품도 많다. 그거 다 (사회에) 내놓고 갈 거다.”
두 미술관은 어떻게 다른가.
“내년 준공이 목표인 박서보 단색화 미술관엔 단색화에 초점을 맞춘 에스키스와 드로잉·판화 등을, 예천군에는 시대별 내 작품 변화를 보여줄 대표작 120점을 기증한다.”
잘 팔리지 않는데도 작업을 쉬지 않고 해왔다.
“늙으면 그리기 어려우니 기운도 있고, 시간과 재료도 있을 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팔리지 않아도 세상 떠나기 전 작품을 기증하려고 죽어라하고 그렸는데 결국 내 계산이 맞았다(웃음).”
춤토르 건축가에게 편지를 썼다고.
“예천은 내 고향이고 인구 5만 농촌 소도시다. 자연도 아름답고, 전통 문화유산도 많지만 현대 문화 시설이 부족한 이곳에 세계에 자랑할 만한 미술관을 남기고 싶다. 그러기 위해 박서보라는 내 이름만으로는 부족하니 세계적인 건축가와 시너지 효과를 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 그인가.
“사상적으로 통하더라. 춤토르는 ‘침묵’ ‘고요함’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아는 건축가다. (춤토르는 "시(詩)는 고요함 속에 산다. 건축은 이 고요함에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철학이 내가 평생 매달려온 단색화 작업과도 맞다.”
서울 연희동 박서보 자택 겸 갤러리 ‘기지’의 1층 전시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서울 연희동 박서보 자택 겸 갤러리 ‘기지’의 1층 전시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박 화백은 춤토르에게 보낸 편지에서 “단색화는 수행을 위한 도구이며 행위의 무목적성과 무한반복성이 이뤄낸 결과물이다. 작업 과정에서 물성이 정신적인 것으로 바뀌는 것 그게 단색화”라고 설명했다. 이에 춤토르는 “당신을 직접 만나고 작품도 보고 싶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장소성이다. 예천의 부지도 방문하고 싶다”고 답했다.

떠날 준비를 차근차근히 하는 것 같다.
“물론이다. 내가 죽을 거란 것은 맡아놓은 거다(웃음). 이미 두 차례의 심근경색과 한 차례 뇌경색을 겪으며 죽을 고비를 넘겼다. 최근엔 단짝 김창열이 떠난 충격이 컸다.”
어떤 마음인가.
“준비하는 게 즐겁다. 떠날 것은 뻔한데 아등바등할 이유가 있겠나. 난 (죽음을) 행복하게 받아들이겠다 했다. 죽음도 삶이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삶. 물론 현세에서 더 건강하게 그림을 그리다 갔으면 하는 마음은 있다. 하지만 언제고 떠나는 거다. 분당 메모리얼 파크에 내 무덤도 준비했는데, 최근에 가보니 양지바르고 너무 아름답더라.”

2018년 연희동으로 이사한 후 건강이 악화해 자신도 가족도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했다고 한다. “내가 있을 자리(납골묘)는 우리 집을 설계한 조병수 건축가가 봐줬고, 그곳엔 내 얼굴 부조와 이름도 다 새겨놓아 준비를 마쳤다. 무덤에 나의 좌우명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변화해도 추락한다’고 써놨다.”

변화해도 추락한다니 무슨 뜻인가.
“우리는 끊임없이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변화는 한순간에 오지 않는다. 나 자신을 차갑게 바라보는 사고의 확장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잘못 변화해도 추락한다. 자기 것으로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변화는 오히려 작가의 생명을 단축한다. 그걸 경계하라는 뜻이다.”
어떤 작가로 기억되길 바라나.
“한국에서 태어나 교육받고, 칠십년 넘게 그림만 그렸다. 언젠가 세상이 나를 알아줄 날이 올 거라 믿으면서. 흙수저로 자라도, 외국 유학 못 가도 ‘진실한 내 것’이 있으면 인정받는다는 희망을 주면 좋겠다. 팔순 넘어서 세계 곳곳에서 내 작품을 전시하고 싶어하니 사정이 이렇게 뒤집히기도 한다. 인생은 그런 거다(웃음).”

박 화백은 “절대로 포기를 모르고 극단적인 면이 있는데, 그림은 이런 성격을 순화하기 위한 것, 즉 도 닦는 도구였다”고 했다. 이어 “한국의 예술은 질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격(格)을 추구한다. 우리 미술의 격을 이해하고 기억해달라”고 당부했다.

박서보

1931년 11월생. 홍익대 미술대 졸업. 1956년 반국전 선언의 주역이다. 1957년 국내 최초 앵포르멜 작가로 활동했다. 1970년대부터 묘법(描法) 연작으로 독보적 작품세계를 구축했고, 홍익대 미대 학장을 지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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