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iew] “도쿄올림픽 성공 협력” 한·일관계 개선 메시지

중앙일보

입력 2021.03.02 00:02

업데이트 2021.03.02 00:58

지면보기

종합 01면

문재인

문재인

지도자의 언어는 넓고 넉넉해야 한다. 국가의 이익이 걸려 있거나 정세가 유동적일 때는 더욱 그래야 한다. 반면에 좁고 강퍅한 언어는 당장 선거, ‘적폐’ 청산 등 국내 정치엔 도움이 될지 모르나, 길게 보면 국익에 해가 될 수도 있고 또 상황이 변했을 때 좁아진 운신의 폭 때문에 국정 운영이 힘들 때가 적지 않다.

문 대통령, 구체적 해법은 제시 안해
“일본과 언제든 대화할 준비 돼 있다”
임기 5년차 대일본 유화 제스처
“피해자 입장서 해결” 원칙은 재확인

바이든 맞춰 한·일 관계 개선 의지
4년간 강경 일변도 ‘말빚’이 발목
일본 정부 “한국 구체적 제안 주시”

문재인(얼굴) 대통령은 1일 사실상 마지막 3·1절 기념사(2022년 3·1절은 3월 9일 대선 직전이다)에서 “우리가 넘어야 할 유일한 장애물은 과거의 문제를 미래의 문제와 분리하지 못하고 뒤섞음으로써 미래의 발전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과거에 발목 잡혀 있을 수는 없다. 과거의 문제는 과거의 문제대로 해결해 나가면서 미래지향적인 발전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넓고 넉넉했다.

하지만 지난 4년간 남긴 말빚의 무게는 꽤 크다. 정부는 박근혜 정부 당시 외교부가 대법원 징용 판결에 우려를 전한 걸 두고 ‘재판 거래’로 몰아가 단죄했고, 대법원에서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의 법률적 효력을 변경한 걸 두고 “사법부 판단을 존중한다”고 했다.

관련기사

위안부 피해 배상과 관련해 “가해자인 일본 정부가 ‘끝났다’고 말해선 안 된다”(2018년 3·1절), “다신 일본에 지지 않을 것”(2019년 8월), “정부는 할머니들이 ‘괜찮다’고 하실 때까지 해법을 찾을 것” 등 피해자 중심주의를 강조했고, 청와대발 ‘죽창가’ 발언 등은 빚에 빚을 더했다. 그러던 청와대는 돌연 지난해 말부터 일본을 향해 유화 제스처를 보내기 시작했다.

지난 1월 신년 기자회견 때는 “위안부 판결은 곤혹스럽고, 일본 기업 자산 현금화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밝혔다. 이어 마침내 3·1절 기념사에서 문 대통령은 “한·일 협력은 한·미·일 3국 협력에도 도움이 될 것이며 언제든 대화를 나눌 준비가 돼 있다”고, “올해 (7월) 열리게 될 도쿄 올림픽은 한·일 간, 남북 간, 북·일 간 그리고 북·미 간 대화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많은 전문가가 관측했듯, 문 대통령의 대일 외교 기조 변화의 핵심에는 조 바이든 미 행정부 출범이 있다.

문 대통령 “한·일 협력은 한·미·일 3국 협력에도 도움 될 것”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열린 제102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해 만세 삼창을 한 뒤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1일 오전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에서 열린 제102주년 3·1절 기념식에 참석해 만세 삼창을 한 뒤 태극기를 흔들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전략적 경쟁자인 중국에 대한 압박을 외교의 축으로 삼은 바이든의 정책 기조에 맞춰 한·일 관계 개선과 한·미·일 3국 협력에 나서는 대신, 임기 마지막 해에 실기하지 않고 북·미 대화의 조속한 재개와 남북관계 진전을 얻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4년간 쌓은 말빚 때문인지 이날 기념사에는 화해·협력의 방향성은 뚜렷했지만 ‘어떻게’가 보이지 않았다.

손열 동아시아연구원장은 “과거의 문제에서 미래의 문제로 옮겨간 것은 지난해에 비해 큰 전환이지만 그래서 과거의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지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다”고 평가했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피해자 중심주의 위배를 이유로 위안부 합의를 사실상 무효화한 정부로선 피해자 중심주의와 일본 입장 존중 사이에서 절충된 입장을 찾기 힘들 것”이라고 우려했다.

실제 한 외교소식통은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 지난해 말부터 정부는 일본 측에 4~5가지 해법을 제시했는데 모두 일본 기업이 먼저 배상한 후 한국이 이를 어떻게 보상하겠다는 내용”이라며 “이는 일본으로선 받아들이기 힘든 제안이었고 이번 기념사에도 전향적인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문 대통령은 이날 기념사에서 “가해자는 잊을 수 있어도, 피해자는 잊지 못하는 법” “한국 정부는 언제나 피해자 중심주의의 입장에서 지혜로운 해결책을 모색할 것”이라고 재차 언급했다.

또 2019년 3·1절에는 제암리 학살, 지난해에는 봉오동 전투를 기념사에서 다룬 문 대통령은 이번엔 1918년 스페인 독감 팬데믹 당시 “일제는 식민지(조선) 백성을 전염병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는 미래지향적 협력과는 배치되는 생뚱맞은 내용인 데다 4월 재·보선을 앞두고 또 한번 반일 정서에 편승하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오는 대목이다.

일본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가토 가쓰노부 관방장관은 정례 회견에서 “현재의 한·일 관계가 징용 소송과 위안부 문제 등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며 “중요한 것은 양국 간 현안 해결을 위해 한국이 책임지고 구체적으로 대응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국 측의 구체적인 제안을 주시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교도통신은 문 대통령의 기념사 소식을 속보로 전하며 “역사 문제와 분리해 일본과 협력을 추진하겠다는 뜻을 강조했지만, 일본 정부를 향한 구체적인 요구나 새로운 제안은 없었다”고 전했다.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메시지에 부합하는 구체적인 행동이 있어야 우리가 원하는 방향 전환이 가능하다”며 “위안부 피해자 배상 판결만 하더라도 현금화는 하지 않겠다는 메시지를 던지려면 피해자 접촉 등 먼저 국내에서 상황을 정비하는 노력을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차세현 국제외교안보에디터
유지혜·정진우 기자 wisepe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